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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을 허문 영화같은 우정'

 

단편영화 감독과 농아배우
ECHO FILM, 정홍규.

 

얼어붙은 샛강, 소녀가 혼자 스케이트를 탄다. 풀밭에 앉아 말없이 소녀를 바라보던 소년. 소녀는 보란 듯 원을 한바퀴 그리다 엉덩방아를 찧는다. 다가와 소녀의 팔을 부축해주는 소년. 작대기로 얼음판에 글씨를 새긴다. 이름이 뭐니? 보영이. 너는?... 침묵,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림. 문득 겁이 난 소녀가 스케이트도 내팽개친 채 황망히 달아난다.

 

홍규(23)를 처음 만나던 날 은령(25)은 영화속의 그 '소년'을 떠 올렸다. 지난해 1월 어느 일요일 아침에 찾아간 도심의 작은 예배당. 홍규는 다섯명의 농아들과 함께 마룻바닥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유려한 '손짓'으로 성경말씀을 보여주던 청년교사. 그를 본 순간 은령은 스케이트를 타던 소녀처럼 가슴이 설렜다.

 

대학을 갓 졸업한 새내기 영화감독. 은령은 자신의 영화에 출연할 주인공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엄마없이 시골 큰아버지 밑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12살짜리 소녀와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소년의 짧은 만남.

 

'나의 왼발'의 다니엘 데이 루이스 같은 배우를 못구할 바에야 진짜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싶었다. 친구의 소개로 찾아간 영락농아인교회. 수줍은 미소 이면에 경계어린 눈빛을 숨기지 않던 홍규를 보며 그녀는 '이 사람이다!!' 싶었다.

 

서툰 수화로 영화출연을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들을 수도 말할 수도 없는 장애인이야. 더구나 영화는 별로 본 적도 없어. 내가 어떻게 연기를 할 수 있겠니?'

 

'너처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찍는거야. 연기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네 모습을 보여주면 돼. 내 영화는 너의 그 살아있는 눈빛과 표정이 필요해!'

 

힘겹게 받아낸 승낙. 하지만 고생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 수화통역사가 있었지만 연기훈련을 시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홍규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고 무슨 말을 해도 건성으로 들었다. 원죄처럼 두사람 사이에 가로놓여진 장막. 무엇보다 그 벽을 허무는 일이 시급했다. 연기연습은 미뤘다. 은령은 통역사없이 홍규와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지화와 수화로, 그리고 공책에 글씨를 써가며 가까이 다가갔다. 영화에서 소년이 입을 옷을 그르러 홍규네 집에 갔던 날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옷을 고르다 말고 홍규는 자신의 앨범을 보여주며 어린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날 때부터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던 아이. 부모님은 광주에서 슈퍼마켓을 하고 자기 밑으로 농아인 여동생이 둘이 있다고 했다. 지금은 부끄럽지 않지만 어렸을 때는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하고외로웠다고 했다. 초등학교 시절 아이들은 '병아리'라고 놀렸다. 나중에서야 그 말이 '벙어리'였음을 알고 울었다. 고등학교 때 컴퓨터와 친해져 경민전문대 사무자동화과에 입학한 홍규. 정보처리사시험에 합격한 뒤 창각장애인을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거라며 웃었다.

 

은령도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영화가 너무 좋아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혼자서 미국으로 건너가 'NYU'로 불리는 뉴욕대학에서 4년간 영화공부를 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고 따뜻한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학도. 학창시절 이후 줄곧 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찍었는데 나름의 사연이 있었다. 유학시절 한인 교회에서 만난 친구 윤아. 뇌성마비장애를 앓고 있던 그녀는 부모도 없이 도서관에서 '도장찍는 일'을 하면서 혼자서 살아가고 있었다. 은령은 윤아의 손발이 됐고 윤아는 외로운 은령의 따뜻한 말벗이 돼주었다.

 

윤아로 인해 알게된 장애인 봉사단체 '밀알'. 공부를 가르치고 몸을 씻기고 심부름을 하면서 그녀는 이전엔 알지 못했던 수많은 종류의 신체적 장애와 그로 인해 겪는 인생의 깊은 골을 이해하게 됐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그 둘 사이의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은령이 말했을 때 홍규의 눈빛은 기쁨과 신뢰로 반짝였다.

 

촬영장인 경기 여주에서의 나흘. 매서운 겨울 바람이 불어대는 들판에서 홍규는 주저하지 않고 카메라 앞에 섰다. 샛강의 얼음판에서 혼자 스케이트를 지치는 소녀. 혼자 노는 데 누구보다 익숙해있던 홍규는 소녀를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실제처럼 연기에 임했다. 소녀를 바라보고, 일으켜 세우고, 이름을 물어보고. 자신이 벙어리임을 알고 도망치는 소녀를 선 채로 바라보는 홍규의 눈빛은 오래전 마음에 새겨진 상처를 되살리는 듯 아프고 쓰라려 보였다.

 

살을 에는 추위, 냉기 가득한 민박집에서의 하루하루. 수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10분짜리 짧은 영화는 침묵속에 자신을 가둔 채 세상과 단절해 살아가던 한 청년을 두려움과 외로움, 소외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했다. 시사회를 관람하던 날, 홍규가 은령에게 말했다.

 

"내게 배우가 될 수 있는 영광을 안겨줘서 고마워. 영화를 찍는 일은 생각보다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영화를 통해 오로지 누나를 알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어. 당신을 만나기 전에 나는 세상의 건강한 사람들은 아무도 내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

 

한편의 서정시처럼 맑고 담백한 영화. <스케이트>는 신체조건이 다른 두 사람의 우정과 믿음이 빚어낸 <작은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