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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이트 - 정성일(영화평론가, 월간 키노 편집장)
"처음에 (이 영화의 줄거리가 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왜 그토록 내 마음에 깊이 남았는지, 왜 그걸 영화를 만들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었어요."
ECHO FILM, 인터뷰에서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풍경은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 자기의 방식으로 그저 버티어 서서 존재한다기 보다는 스스로 눈을 들어 그것을 보아야 한다. 모든 풍경은 보는 순간 생겨나는 것이며, 눈을 거두는 순간 소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영화가 풍경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개를 숙인 사람은 풍경을 볼 수 없다. 또는 하늘을 보는 사람은 풍경에 관심이 없다. 풍경을 보기 위해서는 그저 눈을 뜨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반대로 그것은 스스로의 의지로 고개를 들고 자기의 주변을 밀어내면서,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니콜라 푸생의 계곡이나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산수화'는 그저 눈을 뜬다고해서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풍경은 의지와 관련된 것이다. 그러니까 ECHO FILM의 <스케이트>에서 그 첫 장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화면이 마치 세상의 질서 안에 처음부터 그러하게 있었던 것처럼 버티어 서서 위를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는 그 풍경은 전적으로 세상의 혼돈으로부터 기다려서 얻어낸 것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그저 보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 이 영화는 우리들에게 한발짝 물러나서 거리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 가장 평범한 것으로부터 전적으로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더 잘 바라보게 만들 수 있게 우리들의 풍경을 보는 바로 그 자리를 기어이 찾아낸 것이다. 그럼으로써 여기서 이미지는 그 자신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잡아 놓은 지금 여기의 시간으로부터 전적으로 바라보는 견자(見者)의 의지로 일상생활 안에 묶여있던 시간에 대항하여 밀어내고 잡아당겨가면서 그 고리를 풀어내고 그 안에 새로운 지속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스케이트>가 얼핏 지나치려는 이들에게는 매우 평범하게 보이지만, 정말 여기 담겨 있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 머물려고 하는 순간 종종 그 사이에서 우리를 가장 난처하게 만드는 질문은 그 지속의 의지 안에 담겨 있는 질서가 어디서 온 것일까라는 의문이다. (우리들의 관리되는 사회로부터 벗어나 그 어떤 역사와도 무관하게 눈 내리는 겨울 오후는 누구의 의지인가? 또는 토픽을 만들어내지 않으면서 여전히 그 자체로 완전하게 머물면서 완만하게 경사진 길은 누구의 질서인가?) 우리는 그것이 눈에 보일 때에만 쉽게 유혹당한다. 눈에 보이는 색과 면들은 종종 우리를 흘리고, 마치 그것이 창조처럼 보인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아름다운 영화들은 얼마나 쉽게 우리들에게 싫증을 불러 일으키는가? 아름다운 영화들은 그 안에 사유가 없기 때문이다. 또는 같은 말이지만 사유를 멈춘 대가로 얻어낸 것이다. 그 안에는 즉자적인 이미지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아름다운 광고 이미지가 쉽게 잊혀지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건 원근법과 마찬가지로 눈속임이다. 영화에서 정말 이미지가 자유로운 의지를 갖고 세상으로부터 한발 물러날 수 있는 힘은 언제나 시간과 관련해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을 이 영화는 그 첫 순간 단 한번에 얻어낸다. 영화가 자연에 그 어떤 조작을 가하지 않고 그 안에서 자기의 이미지를 찾는 것은 세상이 이미 예정조화의 안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성으로서 (그런데 누구의?) 자연 안에서 찾아낸 풍경은 (내게 주어진, 동시에 내가 얻어낸) 정신상태이다. 이 안에서 시간은 자연이 아니라 상태이며, 그렇기 때문에 의지이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모더니즘 이후 이미지에서 두 개의 시간의 흐름의 창조, 알랭 레네가 만들어낸 시간의 조립과 집합형식에 의한 경험론과 타르코프스키의 시간에 대한 상대적 존재론 사이에서 이 영화는 그 후자의 계보에서 보는 것이다. <스케이트>의 시간은 슬로우 모션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시간의 의지 안에 들어가서 그 안의 창조의 슬로우 모션의 방법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세상에 느린 영화는 없다. 그건 속도가 다른 것이다.
풍경에서 시작하는 예술가들은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없다. 알리바이는 언제나 허구와 관련된 것이며, 예술에서는 그것을 말하는 자신조차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점점 더 길어지거나 장황하거나 아니면 더 많은 장식이 필요해지는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훌륭한 거짓말쟁이 들이지만 너무 거짓말을 하는데에 시간을 할애하기 때문에 거짓말 자체가 그들의 미학이 된다. 풍경의 저편에서 나타난 보영이 스케이트를 타러 얼음으로 꽁꽁 얼어붙은 논두렁으로 걸어가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선는 아무것도 더 이상 필요로 하지않는다. 이미 풍경은 어린 보영의 내밀한 구도이며 그 반대로 보영은 풍경의 일부이다. 보영은 친구와 스케이트를 지치고 싶지만 친구의 어머니(그런데 어머니는 단 한번도 영화에서 볼 수 없다.) 때문에 집을 지켜야 한다. 혼자 논두렁에 가서 스케이트를 지치는 모습을 보는 사람은단 한사람의 청년이다. 구경꾼은 단 한 명 뿐이고, 그럼으로써 보영과 청년은 하나의 풍경 안에서 머무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인공적인 것도 없다. 하지만 풍경은 그 둘사이에서 눈치를 챈다. 그것은 두 사람이 풍경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하나의 의사소통이라면 그 둘 사이에 대화가 없는 것은 풍경 안을 채우는 인간이 그 세상의 질서를 인위적으로 깨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풍경 속에서 표류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풍경은 질서정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풍경은 그것을 소유하려 들면 들수록 점점 더 기이한 모습으로 뒤틀리고 만다. 그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내버려 두고 거기서 길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거기 아무것도 모르고 자연의 본능에 따라 들어선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 나올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어렵다. 객관적 세계였던 풍경안으로 길을 따랄 들어간 다음에는 이미 자기 자신이 그 일부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 반대로 자기의 의지가 아니라 그 무언가의 힘을 빌려야 한다. 테세우스의 동굴에 관한 오래된 신화는 길에 관한 가장 진지한 형이상학적인 이야기이다. 보영이 다시 돌아나오기 위해서 그 안에서 비전을 찾아야 한다. 그러니까 길을 따라 풍경 안으로 들어간 이 영화가 마지막 순간 다시 길을 따라 나오는 것은 그 대답이다. 그러나 보영이 이번에 길을 나오는 것은 그녀 혼자가 아니라 삼촌의 손을 잡고서이다. 그 손의 이끌림, 그러니까 그것은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 장면에서 카메라는 이제 보영의 눈 높이가 아니라 저 먼 위에서, 하늘로부터 굽어보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며, 그 전체의 풍경을 하나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 영화의 의지를 더 나아가 풍경의 질서를 알게 된다. 저 멀리 보이는 십자가, 아늑한 (들릴 듯한, 또는 안 들렸을 수도 있는) 종소리, 그리고 저 먼 풍경의 끝에 자리한 교회를 통해 비로소 하나로 완성된 풍경을 보게 된다. 이제 잘 알려진 세잔느의 충고, "풍경 속에 부재하는, 그러면서도 전적으로 풍경 안에 있는 사람" 이라는 말을 빌려 이 전제를 하나의 질서로, 또는 이런 말이 허락된다면 그 의지로 통일시킬 수 있다. 풍경에 대한 이 종교적 성찰은 단순히 경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오히려 우리는 풍경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부끄러움에 대한 용기, 같은 장소를 다시 찾아가면서 그 반복된 행위를 통하여 거기서 얻어내는 차이의 지혜, 그리고 그 속에서 얻어낸 의지에의 그 근원에 대한 믿음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한마디로 이 영화는 이미지에 대한 수호천사에의 의지를담고 있는 기도이다. 당신은 그저 그 곁에 앉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마음은 그것에 귀 기울이는 사람에게만 들이는 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