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의 옥중 19년 III
물론 대부분의 비전향정치범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고향이 북에 있고 김일성 주석을 경애하고 조선로동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상전향공작반 교회사들은 정면에서 사상논쟁을 할 만한 능력도 입장도 되지 못했다.
"북괴에는 자유가 없다. 대한민국은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할 수 있다. 얼마나 좋으냐?"
"너희들이야말로 남괴이다. 군대 작전지휘권도 미국이 쥐고 있잖느냐. 부끄럽지도 않느냐, 세계에 그런 독립국이 어디 있어. 너희들의 자유는 노동자를 착취할 자유, 실업할 자유, 걸식할 자유, 몸을 팔 자유, 학교에 가지 않을 자유, 쿠데타의 자유 아니냐."
"김일성은 가짜다. 여러분은 김일성에게 속고 있는 거예요."
"그럼 진짜를 내놔 보시오. 박정희는 일본군 장교였잖소? 김일성 수령은 일본 침략자에 맞서 총을 잡고 싸운 애국자죠."
"한국의 경제성장은 '한강의 기적'이라고들 합니다. 고속도로도 만들었고 텔레비전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죠."
"일본이나 미국한테서 돈을 빌려다 일본제 부품을 가지고 만드는 것 누구라도 할 수 있지. 경제성장이라고 말하지만 외국인과 부자만 살찌게 할 뿐이잖소. 빈부차는 점점 심해지고 민중은 빈곤에 허덕이고 있잖소."
교회사들이 이렇게 말하면 우리들도 받아쳤다.
교회사는 비전향수들에게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대항이데올로기로서 꺼냈다. 그렇지만 반공은 공산주의를 부정하는 것이기는 해도 그 자체가 적극적 내용을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아니다. 총으로 권력을 탈취한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그것을 자유민주주의라고 칭하는 것은 '흑을 백이라고 우겨대는' 식이어서 아무런 진실성도 설득력도 없었다. 1970년대 들어 부정선거, 계엄령, 유신, 대통령 암살, 비상사태선포와 1980년대의 광주학살이란 무시무시한 사건이 연속되던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란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았다. 시장경제와 사회주의경제제도의 우열을 아무리 훌륭한 이론으로 논한다 할지라도 식민지시대와 그 이후 착취당하고 억압받으며 가난 속에서 온갖 고통을 겪어온 대다수 비전향수들의 경제윤리관을 뒤흔들 수는 없었다. (p155)
기밀 개념을 무한정 확대한 결과, 쌀값, 공지된 정부시책, 인구, 거리표시 등등 뭐든지 비밀이 되며 간첩죄의 적용을 받았다. 또 간첩죄는 정적을 곤경에 빠트리고 국민에게 공갈 협박을 치며, 희생양을 만들어내 독재에 대한 비판의 예봉을 피하거나 반공, 반북한 감정을 부채질하는 등 갖가지 형태로 독재정권에게 이용되었다. (p157)
2반 작업반 반대장(班臺長) 이준태 서생은 일본에 잇는 조총련 간부인 아버지를 만났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에 걸려 10년형을 받았다. (p183)
공작관은 거의 교포 2세와 다름없는 어머니에게 우리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냐며 싫은 소리를 해댔다. 영실에게도 이길울 공작관이 "우리말도 못해! 재일교포는 일본에서 편하게 살고 있으니 애국심 따위는 손톱만큼도 없어"라고 욕을 해댔다. 영실이 당한 것이 내 수치심처럼 느껴져 매운 고추를 먹은 것처럼 온몸에 확 열을 받았다. 우리말을 배우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편지에 썼는데 공부를 하지 않은 여동생에게도 화가 났다. "저런 놈한테 무시당하다니!" 해외에 사는 동포도 자기 민족의 말과 문화를 열심히 배워서 긍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재일교포가 우리말을 충분히 못하는 것은 식민지 지배와 조국 분단이 만들어낸 상황에도 기인한다. 게다가 일본에서 민족교육을 지키고 키워내기 위해 정부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애국자인 체하며 설교를 늘어놓는 사람들은 우리말을 배울 수 없었던 해외동포의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단 말인가? 동포의 아픔을 제 아픔으로 여기며 서로 모자란 부분을 도와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유신관료인 공작반장을 동포를 전향공작의 대상으로만 보고 끝까지 못살게 굴었다. (p197)
식민지 지배와 민족분단의 고통을 고스란히 껴안은 재일교포 출신... 남북 본국에서 '장기판의 말' 정도로 여겨지던 재일교포의 운명이 가장 비극적으로 조명된 것은 바로 흔히 간첩단사건의 희생양으로 이들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이다. 김병진의 <보안사>를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과 일본을 왕래하는 재일교포 유학생이나 실업가들은 잠재적 '간첩' 용의자들이었다. 언제든 필요하면 연행해 고문하고 꾸며내 간첩으로 만들 수 있었다. 조총련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 수밖에 없는 재일교포의 생활현실, 국재 안보인식과 공안기관에 대한 이들의 무지, 어눌한 한국어실력과 사고무친에다 국재 무연고 등이 이들을 간첩단으로 모는 데 가장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 있었따. 보안사가 발간한 한 책에는 재일교포 유학생이 한국에 입국하면 곧바로 이들의 호적등본을 입수하는 등 내사에 착수한다고 자랑스럽게 기술하고 있다. 재일교포는 한국 공안기관들의 공적의 먹이가 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었다. (p271, 박원순-참여연대 사무처장, 변호사)
1971년의 '재일교포학생학원침투간첩단사건'은 일본에서 '서형제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재일교포가 본국에서 '간첩'사건에 연루된 첫 번째 사건이며, 이후 1970년대와 80년대에 200여 명의 재일교포가 유학 또는 일 관계로 한국에 왔다가 옥살이를 강요받았다. 옮긴이가 일본에서 만난 어떤 이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어느날 안기부로 끌려가 '간첩'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입던 싸구려 중국제 점퍼가 그 증거물로 체택되었다고 하니, 웃어넘기기엔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재일교포 중에는 감옥살이는 면했다 해도 보안사(안기부)에서 고문이나 인간적 수모를 당하거나 그런 공포적 분위기 때문에 도망치듯, 쫓겨나듯 일본으로 돌아간 이도 많았다.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서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인으로서 정체성을 회복하고 조국의 말과 역사를 배우고자 조국을 찾아온 동포들에게 깊은 상처를 입혀 쫓아낸 꼴이다. 이런 위험상황 아해 그 시기 조국 땅을 밟고 싶어도 갈 수 없었던 이들은 일본 땅에서 치열하게 한국인으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조국의 민주화를 갈망하며 분투해야 했다. (p278, 김경자-옮긴이)
누가, 무엇이 그들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그런 삶을 강요했는가?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의 모순덩어리를 그 안에서 본다. 참으로 힘겹고 무거운 짐이 그들의 어깨에, 우리들의 어깨에 얹혀 있음에 새삼 민족을, 분단조국의 아픔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우리 역사에 식민지시대가 없었다면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며, 조국을 알기 위해 그렇게 애쓰고 19년간 독방에서 지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 민족이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이 성립되지 않았을 터이고, '간첩'죄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에 이은 분단시대의 현실은 엄연하게, 때론 너무나 가혹하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p279, 김경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