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의 옥중 19년 II
나는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대학 졸업 후 한국에 유학하기 전까지는 우리말도 제대로 못했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나라의 역사와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조국분단의 비극을 알고 일본에서, 한국에서 그 희생자를 만났다. 나의 소원은 이 엄청난 희생을 넘어 평화롭고 번영된 통일민족사회를 이루는 것이엇다. 나는 감옥에서 민족분단의 현장을 목격했고, 민족분단으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을 만났다. 당시는 20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으며, 20년이나 이 가혹한 감옥에서 살아남으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p119)
1960년 4.19학생혁명 후 학생을 비롯한 국민들에게 통일에 대한 열망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그해 8월 15일, 김일성 수상은 '연방제 평화통일안'을 제안하고 대대적인 캠페인을 전개했다. 연방제통일을 선전하고 남북의 단합을 설득하고자 1960년과 1961년에 북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족, 친척, 지인을 찾아 남으로 내려왔는데 대부분 체포되었다. 만군파는 주로 함경도 출신 만주 이민자들의 자제로서 북에 가족과 친척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까닭에, 북에서는 '5.16군사혁명주체' 군인들에게 통일을 설득한다며 많은 사람들을 남으로 내려보냈다.
최화종 선생도 1961년 작은아버지에게 민족적 양심으로 돌아가 통일을 위해 힘을 합치자고 설득하러 서울에 내려왔다가 작은아버지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반공법 제6조 3항의 잠입죄에 근거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같은 시기에 통일을 설득하기 위해 박정희를 만나러 내려왔다가 형장으 이슬로 사라진 '황태성사건'이 유명하였다. 황태성씨는 남로당 선산군 당위원장이었던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선배동지요, 친구였을 뿐 아니라 박상희의 결혼 중매인이었다고 한다. 남로당 경상북도 위원장이었던 황태성씨는 6.25전에 북으로 가 무역성 부상(副相)을 지냈다. 1963년 12월 대통령선거가 한창일 때 야당후보 윤보선씨는 박정희가 황태성씨를 몰래 숨겨두고 있다고 폭로하자 박정희는 용공의혹을 벗고자 가족의 은인인 그를 사형에 처했다. 이 사건에 대해, 오늘날 박정희의 인간적 무자비함은 제쳐두고라도 '파괴 목적이 아닌 교섭이나 협상하러 온 사람을 사형에 처한 것은 너무 하지 않았는가'하는 반성이 제기되고 있다. 그 후 공식, 비공식적으로 많은 사자가 남북을 왕래하고 잇는 것을 봐도 수긍이 가는 지적이다. 최하종 선생도 반공법 잠입죄만으로도 36년 동안이나 갇혀 있었다. (p112~113)
특사에는 국군장병도 있었다. 김용운 중령은 김종필과 동기인 육사 8기로 5.16후에 예편되자 재일교포 사업가인 형을 만나러 일본에 갔다 왔는데 그 형이 조총련 간부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p116~117)
일제는 1931년 치안유지법(1925년 제정)의 보완책으로 사상전향제도를 만들고 우리나라에도 이를 실시하였다. 원래 치안유지법은 일본에서 천황제와 사유재산제도에 반대하는 이를 탄압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고 독립을 요구하는 민중을 탄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일본에서는 패전 직후 미군사령부가 일제의 가장 악랄한 제도인 사상전향제도를 폐지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분단되었고, 남한에서는 미국의 후원을 받은 친일파가 권력을 잡고 좌우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가운데 일제의 법과 제도를 그대로 온존시켰다. 우리 민족을 탄압하는 데 쓰인 치안유지법, 조선사상법관찰령, 조선사상법예방구금령은 각각 국가보안법, 반공법, 보안관찰법, 사회안전법이란 이름으로 계승, 재생되었으며, 이를 무기로 많은 애국자와 민중이 살해되고 탄압받았다. 마치 강도의 칼을 뺏어 자기 가슴을 찌르는 것과 같은 자학적 도착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반공은 국시로서 최대의 미덕이었다. 독재정권은 반공이란 이름 아래서라면 인권유린도 살인도 용납된다는 사회 풍토를 만들어냈다. (p147~148)
'막걸리반공법'이란 술을 마시고 정부나 현실에 대해 불평불만을 토로하거나 분노를 터뜨리다가 반공법상 찬양, 고무죄 등 경미한 죄로 잡혀들어온 사람들을 말한다. (이는 서민들의 술자리에까지 정보통치가 침투해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전용되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에 화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단기수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황해도 출신 사람이 북한 황주 사과가 대구 사과보다 더 맛있다고 했다고 찬양, 고무죄로 잡혀들어왔다. 시 직원이 불도저를 동원해 무허가 판잣집을 철거할 때, 집이 부서져 갈 곳 없는 빈민이 "너희들이 그래도 인간이냐? 김일성보다 더한 놈들이다"라고 했다고 반공법으로 기소되었다. '김일성보다 더한 놈'이란 말은 김일성을 상대적으로 높이고 있다는 논리였다. (p152)
일본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에 속하는 부모형제에게 생활비나 용돈을 건네받았다고, 또는 부모 장례식이나 산소를 만드는 데 쓰라고 송금해준 돈을 받았다고 해서 반공법상 금품수수죄에 걸려 잡혀들어오는 일도 흔히 있었다. (p153)
국가보안법, 반공법상 무고, 날고죄로 2~3년에 한 명 꼴로 대구감옥에 들어왔다. 당시에는 미운 사람을 파멸시키거나 큰코다치게 하려고 "거동이 수상해요. 간첩이 아닌지?" "저놈은 빨갱이입니다"하고 밀고하는 일이 흔히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잡히면 죄가 없어도 고문을 당하거나 감시를 받으며 심한 곤욕을 치른다. 잘못되면 날조되어 감옥행이다. 6.25 전후에는 근거 없는 밀고로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단, 밀고당한 사람이 밀고한 사람보다 사회적 힘이나 배경이 있을 때에는 밀고한 사람을 무고죄로 잡아넣는다. 이상하게도 무고죄로 잡혀들어온 사람들한테도 이전에는 전향을 강요했다. (p153)
하원차랑(河源次郞)씨는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후 부모의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으로 돌아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장비 면허를 따서 중동이나 인도네시아 등에 나가 일을 했는데, 석유경기가 침체되어 일거리가 없어지자 관광비자로 일본에 들어가 토목현장에서 품을 팔았다. 우연히 그 회사 사장이 조선적이었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1983년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고문을 당한 후 '해외취업자간첩단' 사건의 주범으로 조작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공범 일곱 명 중 그가 주범이 된 것은 고졸로서 학력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박정희 숭배자로서 공화당 당원연수 2기생인 것을 자랑삼아 떠들었다. "먹고 살려고 일한 게 뭐가 나쁩니까? 나에게 전향하라는 건 빨갱이가 되란 겁니까?"라고 마구 고함을 질러서 교회사도 애를 먹었다.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