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의 옥중 19년 I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국적이 생기고 재일교포 중에는 한국국적을 택하는 사람과, '조선' 표시를 그대로 두는 사람으로 갈라졌다. 이것이 민단과 조총련의 세력분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됨으로써, 한국정부는 재일교포에게 한국국적을 선택하도록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며, 이로 인해 교포사회에서 분단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p19~20)
고등법원에서 한 최종 진술
재일교포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받던 본국에서 심한 고생을 하고 강제, 반강제로 일본에 연행되어 온갖 고생 끝에 해방을 맞았습니다. 해방 후에도 일본에서는 그 사회적 입장 때문에 민족적 멸시 아래서 많은 차별과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재일교포사회에서는 이에 기인하는 대표적 사건으로 김희로사건 또는 이진우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둘 다 살인사건인데, 하나는 살인 끝에 농성한 사건이며 또 하나는 강간살인입니다. 이 사건들은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일본인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사건에 재일교포사회의 생활 또는 실태의 모순점이 집약되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느냐 하면, 하나는 일본에서의 곤란한 생활조건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기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없었던 점에 기인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점이 큰 원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일본에 있는 교포는 한국인으로서 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초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차별당하므로 자신이 한국인이란 것을 느끼는 것에 불과합니다. 바꾸어 말하자며 적극적 의미에서의 참된 민족의식을 자가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극적 민족의식이란 자국의 문화, 역사, 전통, 언어 기타 사정을 깊이 이해하고 인식하며, 그것들을 사랑하고 긍지로 여기는 것이며, 그래서 실제로 풍요롭고 통일된,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조국을 갖는 것이며, 나아가 전민족적 일체감을 확고히 하여 유대를 강화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 가지 조건을 내용으로 해서 적극적 민족주의가 성립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 통치를 경험하였고 해방 후에는 민족분단이라는 비국적 사태를 맞이했으며, 이 속에서 교포사회에서는 조국에 대한 확고한 이미지와 확고한 이상을 갖기가 곤란했습니다. 이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재일교포사회의 이같은 민족사는 바로 한민족의 비극적 민족사의 유아(遺兒)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는 재일교포 2세로서 태어나 김희로사건 또는 이진우사건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65만 재일교포의 미래를 행복하게 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해, 이런 의도에서 적극적 민족주의를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역사적으로 자랑할 수 잇는 민족주의로서 정립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이 일을 위해 온갖 것을 시도하고, 그를 위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조국에 유학을 왔으며, 이북에 갔다온 사실도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앞으로 어떤 국제정세에 놓이게 되건, 또 어떤 변동이 있건, 자주적 평화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명제는 지금은 그 누구도 환상으로 끝나게 해서는 안될 대명제가 되어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생각할 때, 우리들이 남북대립시대의 희생양으로서 이 사건을 오늘의 정세 아래서 그대로 평가하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p75~77)
식민지시대의 폭거와 학정, 우리 민족이 당한 희생은 제쳐두고라도, 해방 뒤 우리나라의 분단과 그 결과인 엄청난 비극은 일제 식민지 지배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가 식민지 지배를 받지 않았더라면 미, 소에 의한 분할점령은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란 가정은 없다는 반론도 있다. '일본이 지배하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야만스런 러시아나 중국의 식민지가 되어 더욱 더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라는 난폭한 의견이나, 일본은 식민지 지배를 통해 조선 경제를 발전시켜 근대화를 촉진시켰다는 '식민지 지배 미화론'도 있다. 그러나 어떤 가설이나 반론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끼틴 실제적인 고통과 희생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으므로 민족분단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뿐 아니라 지금 남북한의 대다수 사람들은 일본이 우리나라의 분단을 자국의 경제발전과 이익추구를 위해 이용하고 통일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p53,54)
1972년 7월 4일, 텔레비전 화면에 나타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은 탈을 쓴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역사적인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971년 8월부터 남북적십자사 사이에 접촉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종래 북한이 주장해온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란 남북통일이 3대 원칙이 정부간에 합의를 보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남북 사이에 군사적 긴장이 높아져 전쟁 위기가 코앞에 닥쳐온 듯했다. 남과 북은 이데올로기, 가치관, 정권의 정통성, 사회경제적 구조 등이 물과 기름과 같았다. 미국 CIA의 충실한 심복으로 널리 알려진 냉혈한 이후락이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악수하다니, 하늘이 놀라고 땅이 진동할 일이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금지된 단어였던 '통일'이 공공연하게 논의되었다. 그날의 충격과 흥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병실에서 텔레비전을 함께 보고 있던 보안부대 대원들도 당혹스러원하는 눈치였다. "이제 서형도 석방되겠네요"했다. 내 마음도 희망의 등불로 확 밝아지는 듯했다.
7.4 공동성명은 동상이몽의 산물이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통일에 대한 기본강령인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오랜 숙원이었던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정치, 군사적 영향력을 배제하고 민족통일을 위한 통일전선을 형성할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은 국내외에서 베트남전 반대운동이 고양되고 막대한 전쟁 비용이 경제적 부담이 되자 1969년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 전쟁'을 강조한 닉슨독트린을 발표하고, 아시아에서 미국의 직접적 개입을 축소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한국 입장으로서는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와 중, 미의 '상해성명'에서 명확해진 국제정치의 다극화라는 세로운 정세에 대응해야 했다. 미국에 예속되어 있던 한국에게 일정에 올라 있던 미국의 베트남 철수가 남의 일이 아니었다. 지붕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것처럼 잠시 쓰다가 언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강한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안으로는 유신체제라는 준전시체제의 강력한 독재를 펴고, 1973년 '6.23 대공산권 문호개방 선언'에서 명확해졌듯이, 밖으로는 외교면에서 다양한 선택 사항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이런 목적 아래 7.4공동성명이란 친미, 반공 군사정권이 자신의 가치관과 상반되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원칙을 일단 받아들여 민중들의 절실한 통일 염원을 정권안보에 이용한 권모술수였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1961년 쿠데타 직후에도 정치적 기반이 불안정하자 박정권은 밀사를 북에 보내 협상카드를 조금씩 내밀며 대북관계의 안정을 도모하려 한 적이 있다. 권모술수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는 많다. 내부에서는 반공의식의 동요를 우려해 반공교육 강화를 지시했다. 북을 적대시하는 국가 보안법이나 반공법은 추호의 변경도 없었다. 남북조절위원회 북쪽대표가 서울에 왔을 때, '평화통일 만세!'라고 씌어진 플래카드를 들고 환영하러 나갔던 사람이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7.4공동성명이 발표되자 감옥 안의 정치범들은 석방을 기대하며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무참히도 서울구치소에서는 한 달 새에 김규남, 박노수, 정태묵, 김질락씨 등 정치범 사형수 18명 전원이 사형집행되었다. (p68~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