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ECHO FILM
벌써 1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내가 이 이야기를 품게 된 것이...
첫 만남은 작년 여름, 8월이었다. 8.15가 다가오면 재일동포들에 대한 특집이 나오곤 하는데 그 즈음 어떤 기사와 도큐멘터리를 접하게 되었었다. 그 기사는 한겨레신문 김효순칼럼(2000년 8월 3일)의 '조총련VS총련'이란 비교적 짧은 글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조총련'이라고 하면 아주 단순하게 간첩단의 아성 혹은 곧 망해야 할 '깡패국가'에 돈을 보내 줘 수명을 연장시키는 정신나간 무리 정도로 인식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조총련'이란 표현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신 일본에서는 그 단체를 '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를 줄여서)이라고 부르는데 총련 동포들이 온갖 불편과 차별을 감수해가며 버텨 온 것은 북한에 대한 맹목적 충성 때문이라기보다는 민단이나 남쪽 정부가 우리말과 글을 배우는 기회를 거의 제공하지 않은 것에 비해 총련 쪽에서는 민족교육을 지켜왔기 때문이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무엇보다도 내 마음에 깊게 남았던 내용은 재일동포사회가 남북한과 미수교상태에 있었을 때에는 오히려 큰 문제가 없었지만 1965년 한국이 일본과 수교를 맺게 된 후 남쪽 정부가 동포들에게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도록 요구하며 '줄서기'를 강요하자 동포사회의 분단이 본격적으로 심화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큐멘터리는 일본에서의 '민족학급'에 관한 내용이었다. '민족학급'이라는 것은 일본 학교에 다니는 동포 아이들(지금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주로 4세이다)에게 재일한국,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는 모임이다. 1945년에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벗어났다고 하지만 재일동포들에게는 어떤 면으로는 그것이 현재진행형이다. 대부분의 재일동포들이 통명(일본이름)을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고 드물게는 16살이 되어 외국인등록증을 받게 될 때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민족학급에서는 동포 아이들에게 본명에 대해 가르치고, 민족학급 내에서는 서로 본명으로 불러 주도록 한다. 그리고 장고 등의 우리 악기라든지 우리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민족의 문화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워가며 긍정적인 정체성을 가지도록 돕고 있지만 정식 수업이 아니고 클럽활동처럼 1주일에 한 번 정도 방과후에 모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한계도 많이 느끼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 한번도 접해보지 않았던 (따라서 생각해본 적도 없는...) 내용이었지만 몇 주 정도의 차이를 두고 접하게 되었던 그 기사와 도큐멘터리의 내용이 내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서서히 지금 가지고 있는 이야기의 뼈대가 조금씩 떠올랐다. 오사까 칸사이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여자주인공. 금융계 쪽에서 일하고 있는 성공적인 커리어우먼. 그리고 민족학급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남자. 두 사람은 과거에 연인이었지만 여자의 가족의 강경한 반대로 헤어진 상처를 가지고 있고 여자가 오사까에 머물며 일하는 동안 다시 만나게 된다...
이런 대강의 스토리가 떠올랐었지만 바로 시나리오를 쓰지는 못했었다. 일본은 물가도 비싼데 제작비가 많이 들겠지... 나는 일본어도 못하는데... 재일동포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데 그들에 대해 감히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라는 생각에 일단 일본어는 배우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학원 수업에 들어가기 전 커피를 사러 던킨도너츠에 들어갔는데 어떤 아저씨가 신문을 보고 있는데 '재일동포 피아니스트 ...'라는 기사가 내 눈에 크게 들어왔다. 그 기사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서 기웃거리고 있는데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는 그 아저씨가 신문을 통째 주고 가셨다. 그 '재일동포 피아니스트'는 양방언이라는 분인데 며칠 후 호암아트홀에서 콘서트가 딱 한 번 있다고 했다.
며칠 후, 콘서트에 갔다. 친구와 같이 가자고 약속을 하고 그럴 새도 없어서 혼자 갔었는데... 너무나도 너무나도 훌륭한 콘서트였다. 그 날 연주된 음악은 모두 양방언씨가 작곡한 곡이었는데 그는 피아노뿐만이 아니라 하프, 아코디온, 가야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악기를 정말 멋지게 연주하셨다. 국악을 가미한 곡들도 있었는데 그 음악은 푸리(원일씨와 지금은 푸리를 나온 최고의 장고 연주자 민영치씨 등의 4명의 멤버)와 함께 연주했는데 너무나 신선하고 힘이 있고 아름다웠다.
그러는 가운데 12월이 왔다. 올해를 넘기지 말고 일본에 가 보아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 스토리의 배경을 오사까로 설정해 놓고 있었지만 오사까에는 한번도 가 본 적이 없었다. (도쿄에만 두 번 정도 가 보았을 뿐...)
일본에 도착해 민족학급 선생님들을 만나고 그러면서 매일매일 내 머리 속에는 '할 수 있을까? ... 무리일 것 같아... 그래도...'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쳇바퀴를 돌았다. 하지만 일본에 있던 2주 동안 계속해서 내 귀에 음악이 들렸다. 양방언씨의 음악이. 그분이 음악이 담긴 영화를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는 마음이 들었다.
일본을 떠나기 하루 전, 민족학급 선생님 한 분이 나에게 일본에서의 민족교육에 관심이 있다면 총련 쪽의 조선학교에 가보라고 말씀해주셨다. 그래서 조선학교에 처음 가보게 되었는데 그 날은 마침 종업식 날이었다.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이꾸노구의 제4조선초급학교. 그 학교의 교장선생님이셨던 한부택 교장선생님이 유치원부터 한 반 씩 (한 학년에 한 반밖에 없음) 안내해주셨다. '남조선'에서 온 내게 그 학교는 매우 흥미로웠지만 동시에 매우 낯설기도 했다.
한국에 돌아와서 남자주인공의 설정을 민족학급 교사로 갈 것인지 아니면 조선학교의 선생님으로 정할 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영화 개봉한다고 할 때 우익단체에서 극장에 불을 지른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일본말이 안 되어도 왠지 민족학급 쪽이 더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조선학교 쪽으로 가기로 결정을 하고 두 번째 오사까에 갔을 때부터는 조선학교에 집중해 리서치를 했다.
지금까지 일본에 4번 갔다 왔지만 아직도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은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이 영화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과의 소중한 만남들이 내게는 정말 큰 힘이 된다.
2001년 11월 13일, 부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