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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Y, 뉴 시네마 ‘1991’ 천국(1991.03)
91년 베스트 원 영화
비탈리 카네브스키 감독의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 이 영화는 90년 깐느영화제 카메라도르(황금 카메라상)를 받았고, 이어 프랑스 영화평론지 카이에 뒤 시네마는 베스트 원에 올려놓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발견뿐!
비탈리 카네부스키 감독의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의 첫 장면. 흑백으로 포에틱하게 그려낸 이 시작을 통해 그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비평가들로부터 그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후계자로 부르고 있는데, 특히 영화 속에서 거듭 ‘정당하지 않게…’라고 하는 것은 감독 자신의 메시지일 것이다.
유년기는 아름답기만 한 것일까? 20년 동안 유배생활을 보낸 소련의 비탈리 카네브스키 감독은 끔찍하도록 아름다운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로 지난 시간을 회상한다. 숨이 멎을만큼 아름다운 장면.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카네브스키는 ‘자, 가자!’라고 말한다.
유년기를 회상해볼 때 어떤 심상에 잠기게 될까? 마냥 순수하고 아름답기만한 동심의 세계? <시네마 천국>의 토토의 어린 시절처럼 즐거운 추억만이 가득한 그리운 옛날? 이런 1차원적인 감상주의적 생각에 카네브스키 감독은 50여세의 나이에 만든 의지의 역작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거야>로써 의문 부호를 던진다.
영화의 첫 장명은 광산에서 광부들이 진군을 하는 모습과 함께 ‘자, 가자’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도입부가 광산인 까닭은 카네브스키 감독이 정치적 구류 생활을 하면 20년 동안 있은 곳이 광산이란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터널의 심상, 곧 어둠과 박탈에서 그 상징성을 미루어 짐작함에 더 타당성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자막도 중요한데 그 이유는 암담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을 딛고 일어서려는 의지가 거기에 농축되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12살짜리 악동 주인공 발레르카는 어머니와 둘이서 소련의 극동에 위치한 쓰촨에 살고 있다. 모스코바에서 멀리 떨어진 이 곳은 정치적으로 숙청을 당했든지 여타의 이유로 사회의 중심 세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장소, 위치적 관계로 일본인도 많다.
가정의 경제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까닭에 스케이트를 사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차를 파는 발레르카의 가장 강력한 적수는 여자친구 갈리아. 발레르카는 한 컵도 못 팔고 있을 때 갈리아는 손님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발레르카는 “저 아이의 차에는 독이 들어있어요!”라고 외치지만 소용이 없다.
어쨌든 고생 끝에 스케이트를 장만해 신나서 얼음판에 달려가는 데 그만 동네 깡패들에게 빼앗겨버리고 만다. 발레프카는 강력하게 저항을 하지만 두 명이 덤비는 지라 어쩔 수도 없는 상황. ‘정당하지 않게…’라고 중얼거리는 발레르카.
그리하여 발레르카는 세상이 온갖 부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고 모순에 저항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엄청난 정치극을 꾸미는 것은 아니고 열 두 살의 수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나름대로 한다. 기차에 몰래 숨어 타고, 장난치다가 학교에서 쫓겨나고 결국에는 열차를 전복시키는 어마어마한 일까지 저지르고 만다. 그래서 다른 마을 시골 외할머니댁에 가서 숨는데 거기에도 경찰이 찾아오자 도망쳐 나중에는 일본인 보석 가게를 터는 데 한 몫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갈리아가 찾아와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마도 이 때가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인 듯, 소년 ,소녀는 달리는 기차 양쪽에서 서도 돌을 던지는 등 장난을 하며 행복하게 웃는다. 그런, 철로가 죽음과 삶을 갈라놓는 상징성을 띠고 있을 줄이야. 갈리아의 죽음에 갈리아의 어머니는 미쳐버려 전라로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니고 영화는 쓸쓸하게 끝난다. 영화 중 소련의 사회상을 드러내는 충격적인 장면이 있는데 하나는 15살 밖에 안 되는 소녀가 어떤 남자에게 제발 같이 자달라고 애걸을 하는 장면이다. 임신을 하면 수용소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소녀는 뼈 밖에 안 남은 앙상한 몸을 드러내면 애원을 하지만, 남자는 떠나가고 소녀는 욕을 하다가는 결국 주저앉아 울고 만다. 또 하나는 모스크바에서 축출되어 정신이 나가버린 학자에게 그를 동정하며 밀가루를 좀 나누어 주지만 그는 몇 발자국도 못가 주저앉더니 밀가루와 흙을 섞어버리고 만다. 그 부분에서 얼글을 근접 촬영하여 완전히 희망을 잃어버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보여주고 노출을 한 단계씩 높인 것은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영화 전편에서 정서의 상통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장소의 배경이 극동 마을인 쓰촨이라서 더더욱 그런지 모르겠지만 노래가 나오는데 이게 한국 노래가 아닌가 정말 귀를 의심했다. 한과 애환이 서린 우리 민족의 정서를 러시아인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어디에 살던가에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일까.
<나의 왼발>에서 <땅>으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처절한 명연을 보여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을 받은 <나의 왼발>의 감독이 누군지 기억하시는 영화광은 몇 명이나 될까? 이 야심적인 데뷔작의 감독 짐 쉐리단이 기대를 배신하지 않은 두 번째 영화 <땅>으로 리차드 해리스를 남우주연상 후보로 올려 놓았다.
짐 세리단(Jim Sheridan)의 이름은 <나의 왼발>로 아카데미 주연남우상(다니엘 데이루이스)과 조연여우상(브겐다 픽커)를 휩쓸며 ‘아일랜드의 무서운 아이’ 정도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신작 <땅>(The Field)을 보고 나면 <나의 왼발>은 예고편에 불과하지 않았나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거장 예감’이라 하면 너무 이를까? 어쨌든,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독자라면 이름을 기억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땅/필드>의 감각은 <나의 왼발>의 도입부와 같은 빛 바랜 녹색조의 어두운 느낌이다. 하지만 <나의 왼발>에서 브라운이 어른이 된 후의 장면은 희망의 색조로 처리된 것에 비해 <땅/필드>의 절망의 어두움은 영영 밝아지지 않고 무겁게 깔린다.
빌 멕케이브(리차드 해리슨)은 평생 흙에서 일을 해 잔뼈가 굵은 농부. 기다린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그에게 감히 대들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소망은 자기가 10년째 돌보아오고 있는 영국 미망인 소유의 땅을 사는 것이다. 아일랜드인으로서 선조의 땅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은 거의 신성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그는 영국인 미국인 등 외국 세력에 굉장히 적대적이다. 1845-49년에 감자 단일 경적으로 인한 대기근 때, 아일랜드인이 굶어 죽고 대규모로 미국에 이민을 가 북부 공업 지대에서 흑인 노예보다도 더 못한 대우를 받고 있을 무렵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에서 본국으로 곡식을 실어날랐음을 그는 기억한다. (사실, 아일랜드는 근 800여년을 영국 통치하에 있었고, 현재로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아있어 소수이면서도 경제권을 대부분 장악하고 있는 신교 영국인들과 다수의 비교적 가난한 아이리쉬 사이에는 경제적, 종교적, 민족적 갈등이 합쳐져 분쟁이 끊일 날이 없고, 테러도 끔찍하다.) 그의 미국인에 대한 평가도 영국인에 대한 것에 비해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 그는 미망인의 땅을 사려 하는 미국인에 대해 ‘도둑’이라 말하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법보다 더 중요한 땅의 법을 깨뜨리고 그의 피땀어린 수고를 ‘시멘트’에 묻어 버리려는 천하의 도둑이라고…
마을 교회의 신부도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세상의 법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하는 그는 땅에 대한 욕심으로 말미암아 살인이 범해진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는 마을 사람에게 범인을 숨기는 것에 대한 책임을 돌리고, 일요일날 미사에서 온 모든 사람을 문 밖으로 내쫓는다. 하지만, 설교 때 그렇게 강직하고 결연했던 그이지만 맥케이브의 ‘사람들을 하나님의 집에서 내쫓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이냐?’는 질문에 답을 못한다.
1965년도 어떤 사회학 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일랜드가 전세계에서 정신질환자의 빈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외세에 의해 짓밟힌 역사가 사람들의 희망을 앗아가는 것일까? <땅/필드>에서도 흙에 대한 애착이 결국에는 광기로 바뀌고, 부조리는 죽음에 죽음을 이어 부른다.
마지막 장면에, 순종하는 것 밖에 모르는 줄 알았던 아들이 자기는 흙에 전혀 관심이 없노라, 땅에 집착하는 사람을 오로지 아버지 때문이라며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네에서 멸시받는 땜장이 집 딸과 함께 집을 나가자 빌 멕키이브는 급기야 완전히 미쳐버려 집안 살림을 다 부수고 생명과 같이 아껴오던 가축들을 절벽가로 내어몬다. 그 때 아버지가 실성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이 ‘아무도 아버지를 배반하지 않았어요!’라 소리치며 뛰어 돌아오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달려오는 소떼에 치여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다.
허욕으로 두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지팡이를 흔들며 파도 사이로 걸어가는데 그 모습은 마치 리어왕의 ‘천둥아, 내리쳐라!’처럼 거의 인생을 포기한 듯하다.
그러나 온갖 불행에도 절망과 타협하지 않는 꿋꿋한 영혼이 있다. 빌 맥케이브의 부인은 아들 둘과 남편을 모두 잃었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 순간 성호를 긋고 주기도문을 외운다. 주기도문과 절벽의 심상 – 실로 장엄한 마지막 장면이다.
피터 와이어의 최신작 <그린 카드>
<죽은 시인의 사회>로 우리 독자들에게 베스트 원 감독으로 손꼽힌 피터 와이어 감독이 최신작 <그린 카드>로 돌아왔다. 특히 제라르 드파르디유는 <시라노 백작>으로 골든 그로브를 석권하고 아카데미상 후보로도 올라와 있다. 피터 와이어 자신에 따르면 <그린 카드>의 기획은 2년전에 시작되었으나, 제라르 드파르디유의 바쁜 스케쥴로 미루어져 남는 시간으로 <죽은 시인의 사회>를 찍었단다. 이런!
제라르 드파르디유와 앤디 맥도웰 대열연의 <그린 카드>는 미국판 ‘깊고 푸는 밤’이라고 부를만하다. 48시간 동안 ‘진짜’ 부부 행세를 해야하는 이 커플은 성공할 것인가?
고대하던 피터 와이어 감독의 신작이 드디어 나왔다. 제목은 <그린 카드> - 그린 카드(미국의 영주권)을 얻고자 하는 프랑스 남자와 위장결혼을 해 준 미국 여자 사이에 벌어나는 로맨틱 코미디가 맨하탄의 빌리지와 이스트사이드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감독은 친구 제랄드 드파르디유를 미국 대중 관객에게 선보이기 위해라고 제작 동기를 밝히고 있다. 스크립트 등 모든 준비가 2년 전에 끝났는데 드파르디유의 개인적 사정(너무나도 빽빽한 스케쥴)으로 미루어져 그를 기다리는 동안 찍은 작품이 <죽은 시인의 사회>라고.
상대역으로는 앤디 맥도웰이 캐스팅 되었는데, 그녀의 자연스러운 연기력이 높이 사졌다고 한다. 하긴 녹지 운동을 위해 온 노력과 정성을 기울이는 브론테 역에는 싱그러운 초록을 느낄 수 있는 자연성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겠지만.
조지(드파르디유)는 그린 카드를 목적으로, 브론테(맥도웰)은 그린하우스를 바라보고 – 이스트 사이드의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집에 입주하는 조건이 결혼한 부부였기 때문 – 얼굴도 한 번 본 적이 없는 채로 친구의 소개로 결혼신고를 무사히 마치고 제 각기의 인생을 펼쳐나갈 것을 꿈꾸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이민국 직원으로 말미암아 두 사람은 48시간 안에 ‘서로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야만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래서, 둘이 같이 사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조지가 브론테의 집에 들어와 이틀을 지내며 ‘진실을 알아내는 작업’이 시작된다.
브론테는 자신의 사진첩을 보여주며 작가인 아버지(브론테의 이름을 비롯한 그녀 자매, 형제의 이름은 모두 유명한 소설가의 이름)를 이야기하고 대학교 시절 데모에 참여했던 것을 말한다.
조지는 12살에 집을 나와 길거리를 떠돌며 바에서 피아노를 치며 살아 온 지난 날(13살에 집을 뛰쳐나온 드파르디유의 이야기 – 스크립트가 순전히 드파르디유를 염두에 두고 씌여진 것을 기억하라)을 이야기하며 팔의 하트와 칼등 문신을 보여준다. ‘코미디는 어떤 장르보다도 힘들다’고 와이어 감독은 토로하고 있지만, 영화를 보며 걱정이 기우였음을, 아니면 그가 얼마나 세밀하게 신경을 썼는 지를 알 수 있다.
한 예로, 프랑스인답게 요리는 자신에게 맡기라고 자청한 조지와 브론테가 슈퍼마켓에 가서 동시에 조지는 바게트(길죽한 프렌치 빵), 브론테는 호밀빵을 고르는 장면, 존재하지 않는 둘의 과거를 조작하기 위해 옥상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장면 등은 정말 웃음을 자아낸다.
정신없이 웃는 가운데 가슴뭉클한 감동도 놓칠 수 없다. 조지가 떠나간 후 그가 심어놓은 빠알간 토마토나무(조지의 관심은 먹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브론테는 그를 가르켜 ‘인생을 먹으려는 사람’이라 표현하지만, 그 결과, 몸무게는 비밀!)와 연못의 금붕어를 바라보는브론테의 눈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주목해야 할 점은 두 사람의 공통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두 사람이 바라는 것의 공통점 – 그린 카드와 그린 하우스, 어떤 상징성을 찾을 수 있을까? 도입부의 슬럼가에서 나무를 심는 브론테와 친구들의 모습은 혼돈과 절망 속에서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어린 아이들이 오를 수 있는 희망의 나무를 심으려는 의지이다. 이 평화의 이미지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재 더 소중하고 모든 삶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하겠다.
그리고 또 하나. 맨하탄을 (뉴욕→미국) 이렇게 현미경과 같은 눈으로 세심하게 그려낸 영화는 없었다. 오프닝 시퀀스 – 땀을 뻘뻘 흘리며 드럼(사실은 양동이를 뒤집어 놓은 것에 불과)을 신명나게 연주하는 흑인 소년, 동양인 그로서리에서 브론테가 꽃을 사는 것, 어둠을 뚫고 지나가는 9번 지하철 – 모두 전형적인 뉴욕의 모습이다. 노란 택시와 센트럴 파크도 맨하탄의 기분을 더해주는 데 많이 도움이 되었고, 마지막 장면에 흑인 합창단의 노래도 정말 좋았다.
비록 등장인물은 코케이시아인 일색이지만 미국의 중요한 문화-아프리카 문화-를 소외시키려 하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사실 이 영화의 밑에 흐르는 테마가 아프리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카페의 이름이 ‘아프리카’인 것에서부터 시작해 조지가 아프리카에서 토속음악을 연구하다 온 작곡가라고 거짓말을 꾸며내는 것 등. 더구나 테마 음악도 에냐의 ‘아프리카의 폭풍우’(에냐의 ‘워터마크’도 아울러 삽입되었다)와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중심 음악이었던 모차르트의 음악이 나와 첫 장면과 끝 장면의 아프로 어메리칸(요즈음 미국에서 흑인들이 자신을 부를 때 사용하는 신조어)의 음악과 함께 ‘아프리카’의 심상을 제시해준다.
‘리쎌 웨폰’ 멜 깁슨의 <햄릿>
<매드 맥스>, <리썰웨폰>으로 압도적 인기를 모은 멜 깁슨이 이번에는 ‘시침 뚝 떼고’ <햄릿>에 도전한다. 더구나 감독은 <로미오와 줄리엣>, <토스카니니>의 프랑코 제피렐리여서 많은 기대를 모았는데, 그 결과는 찬반양론이다. 그 중에서도 피터 트래비스의 악담은 일류인데 ‘영화사상 멜 깁슨보다 더 우악스럽게 표정지은 햄릿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로 자신의 평을 끝냈다.
멜 깁슨의 예상치 않은 명연과 셰익스피어 전문가로 알려진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의 대담한 재해석으로 91년 초 헐리우드를 고전 <햄릿>으로 장식하였다.
‘햄릿은 배우라면 누구나 한 번쯤 연기해 보고 싶은 역’이라고 프랑코 제피렐리 감독은 말한다. 사실 감독 자신도 대학교 시절 햄릿으로 분해 무대 위에 섰었고, 60년대에는 연출을 맡기도 해 햄릿의 영화화는 전혀 낯설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셰익스피어에 심취해 있다는 것은 대표작-<로미오와 줄리엣>, <말괄량이 길들이기>, <오델로>-등으로 이미 잘 알려진 사실.
그리고, 이번 작품은 제피레리 감독의 재기작으로 의미가 있는데, 왜냐하면 80년대에 오페라에 치중하며 (서울 올림픽 문화행사에 소개된 오페라의 감독이 그였다) 개인적인 경험을 많이 쌓았지만, 바로 전 작품 <토스카니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배급업자를 구하지 못하는 등 상업적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80년 초반의 <챔프>나 <끝없는 사랑>이 대중 관객의 지지를 받은 반면 평론가들에게 외면당하고, 마틴 스코세지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 사건 때 유태인 편에 서 영화를 공박하고 나서 헐리우드 영화인에게도 미움을 받는 등 이래저래 사면 초가였다.
어쨌든, 어려운 상황에도 불과하고 일단 <햄릿>은 예술성, 상업성 두 측면에서 긍정적 평가를 얻고 있다. 흥행의 성공 요소를 치자면 아무래도 멜 깁슨의 기용을 들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수긍이 가지 않아 보이기도 하지만, 감독은 <리썰웨폰>에서 죽은 나래를 그리워하며 총구를 입에 집어넣는 깁슨의 모습에서 바로 햄릿의 고뇌 –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를 볼 수 있었다며 나름대로의 이론을 제시한다.
햄릿은 연극으로, 영화로, TV 드라마로 수없이 만들어진 바 있지만 대부분 셰익스피어의 대본에 충실한 채 아주 작은 부분만이 감독의 재량권에 허용된 것이 여태까지의 예였다. 하지만, 프랑코 제피렐리는 시나리오 작가 크리스토퍼 드보레와 함께 자그마치 400년의 전통을 뒤집어 엎는 모험을 벌였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단순히 원작소설화하고, 사건순서와 인물해석이 전혀 다른 새로운 <햄릿>을 창조해낸 것이다. 한 예로 밤에 아버지의 혼이 나타나는 장면은 너무 유명한데, 이 <햄릿>에서는 햄릿이 어머니의 너무나도 빠른 재혼으로 인해 실망하고, 울분에 가득 차 있을 무렵 귀신이 등장한다. 좀 더 현대적이고 심리학적인 접근방법이라고나 할까. 더욱이 귀신의 모습은 다른 영화에서처럼 갑옷으로 무장한 그런 모습이 아니고, 살아 있을 때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양이다.
또, 시대 배경에도 변화를 주어 원래 엘리자베스 여황 시대에서 몇 세기 거슬러 올라가 14세기가 배경이다. (그래서 오필리아의 의상이 로마 시대의 토가에서 약간 발달한 형태의 수수한 드레스이다) 그리고, 제작팀은 처음에 당연히 논리적으로 덴마크의 성을 찾아 헤매었지만 결국에는 ‘타고난’ 셰익스피어의 느낌을 가지고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있는 영국에서 찍기로 하였다. 최종적으로 선발된 장소는 잉글랜드의 도버와 스코틀랜드의 던노타와 블랙니스. 관객은 400여년 동안 시커만 극장에서 갇혀져 있던 <햄릿>에서 비로소 해방되어 푸른 하늘과 녹색의 자연 속의 햄릿을 감상하게 된다.
제피렐리 감독은 햄릿과 게르투르드(왕비)와의 관계를 단순한 모자간이 아니라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측면에서 바라보았다. 즉, 오필리아가 햄릿의 어머니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미성숙한 사랑으로 희생당한다는 것, 특히 오필리아를 사랑했던 것을 부정하는 장면에서 햄릿이 ‘이 세상에 더 이상 결혼이 없으리라’고 저주를 한 뒤 혼자 남겨진 오필리아를 회색 돌벽의 배경으로 멀리 그녀의 외로움을 표현했다. 그리고 원래는 그 장면과 붙어있는 ‘수녀원에 들어가라’는 대사를 연극에서 나오는 부분과 떼어놓아, 햄릿이 오필리아를 조롱한 후로 연결되게 하여 햄릿의 경솔함으로 아연해하는 오필리아의 감정을 이번에는 근접촬영으로 잘 표현하였다. 햄릿의 변심과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오필리아는 실성하고 결국 물에 빠져 죽고 마는데, 물 위에 꽃잎 마냥 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모순적으로 너무나 아름답다. 오필리아역을 맡은 헬레나 본햄 카터(<전망 좋은 방>)은 예의 정확한 영국 발음으로 셰익스피어의 고전적 오필리아상에 약간의 현대적 해석을 첨가해 무리없이 소화해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