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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으로부터의 편지 - 행크스vs라이언, 또는 빅vs샐리(1990.06)

 

 

AIDS 영화제와 용감한 여성이 판치는 뉴욕 영화계

 

뉴욕의 극장가에는 영화제가 끊일 날이 없다. 그러나 4월의 영화제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봄 기운에 넘치고 색다른 것이었다. 신진 감독의 작품만을 모아서 보여주는 'New Directors New Films 영화제'는 경쟁 보다는 젊은 영화작가를 키운다는 성격이 강하다. 이 영화제를 통화여 영화계에 등장한 감독들로는 70년대의 스티븐 스필버그, 빔 벤더스를 비롯하여 80년대의 스파이크 리까지의 수많은 쟁쟁한 영화작가들이 있다. 작년에 가장 주목을 모은 영화는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소련의 <리틀 베라>였다. 올해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89년 깐느에서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제치고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한 헝가리 출신인 일디코아녜디의 <나의 20세기>. 흑백으로 촬영된 이 영화는 버마, 헝가리, 시베리아를 넘나들며 미학적 상상력을 시험하고 있다.

 

미국에서 유일한 다큐멘터리 영화제가 열렸다. 올해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은 AIDS에 관한 기록 영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이 지역적으로 동성연애자의 입김이 센 곳이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 가고 있다. AIDS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환자들의 사례가 보고되면서 역으로 사람들이 동성연애자들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고, 동성연애자들은 이 기회를 잡으려고 동성간의 결혼의 자유 등을 부르짖으며 길거리로 나서고 있다.

 

AIDS로 인해 사망한 예술가는 수도 없이 많다. 세계적인 파문을 일으킨 록 허드슨이 대표적인 경우이고 최근 마돈나와 맷 딜런이 출연한 <브로드웨이의 탐정>의 감독 하워드 브루크너는 개봉 몇 달 전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그의 남자 애인 옆에서 쓸쓸하게 죽었다.

 

동성연애자인 동시에 흑인인 남자를 상상할 수 있는가. 그보다 그가 받아야 하는 사회의 편견을 생각할 수 있는가. 마론 리그의 <말할 수 없는 혀>는 미국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AIDS와 인종편견-에 대한 일반 사람의 편견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톰 행크스 + 맥 라이언=<죠와 화산>. 이 공식은 최근 개봉한 앰블린 엔터테인먼트의 <죠와 화산(Joe vs the volcano)>에 적용된다. 감독은 <문 스트럭>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고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죤 샌리이다. 불행하게도 기대한 만큼의 큰 수입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관객들을 매우 만족하게 하는 요소가 다분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죠 뱅크스(톰 행크스)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매일 아침, 사람의 물결에 실려 회색 빛의 공장에 출근을 한다. 그에게는 이해 못할 아동적인 성격이 있는데 환상적이고 이국적인 등을 사무실에 갖다 놓는 것이 한 예이다. 무력함과 피곤 증에 시달리던 틴죠는 의사로부터 충격적인 진단을 받는다. 이유조차 알 수 없는 불치의 병으로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이다.

 

그 날로 회사를 그만 둔 죠에게 어떤 신사가(신데렐라의 요술 지팡이 같은 존재이다.) 찾아와 모종의 제안을 한다. 계약의 내용은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골든 카드. 늘 봉급쟁이의 신세에 지나지 않던 그로써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이 매력적인 것이다. 단 조건은 남태평양 섬에 가 화산에 용감하게 몸을 던지는 것. 이미 의사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은 죠는 이 뜻하지 않은 사치를 즐기기로 한다. 그 순간부터 죠의 인생이 달라진다. 리무진을 타고 5번가를 누비며 물건을 사고 머리도 다듬고 초호화 특급호텔인 메디슨 애비뉴의 호텔에서 묵는다.

 

죠의 모험은 작은 배를 타고 남태평양으로 가는 길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배의 주인 맥 라이언과 사랑에 빠지고.

 

영화 주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90년대의 '능동적인 여성상'이다. 맥 라이언(1인 3역을 맡아 코미디언으로 재능을 시험하고 있다)은 남자 주인공보다 더 똑똑하고 용감하고 진취적이다. 폭풍우 속에서 자신의 배를 구하기 위해 겁 없이 파도가 심한 갑판 밖으로 나오는 것은 미미한 예에 불과하다. 톰 행크스가 화산에 빠져 죽기 위하여 떠날 때 그를 붙잡고는 "잠깐 기다려요. 사랑해요. 지금 당장 (죽기 전에) 결혼해요"라고 폭탄선언을 하는 광경은 80년대까지의 영화만해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자가 먼저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고 청혼을 하는 것은 현대인이라 자부하더라도 약간은 생소한 느낌이 없지 않는데 맥 라이언은 그 장벽을 베를린 장벽처럼 허물어 버렸다.

 

오스카 음악상 2개 부문을 휩쓴 <인어공주>도 앞서가는 여성의 좋은 예이다. 인어공주는 용모부터 미인의 절대적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 오히려 빨강머리, 큰 입, 납작코 등 개성 있는 현대 여성의 모습이다.(30년 전의 잠자는 공주는 늘씬한 금발 미녀였다.)

 

 

여전히 천재를 무시한 아카데미 뒷공론 무성

어린 시절을 추억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영화에 바치는 로맨틱한 시 <시네마 천국>에 아카데미 위원들은 오스카를 바쳤다. <시네마 천국>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달콤한 지난 날의 회상으로 가득 차 있다. 조숙한 영화광 토토와 알베르또 아저씨와 우정도 아름답기만 하다.

 

하지만 동심이 선함으로만 가득 차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열 다섯 명의 10대 소년들이 사고로 어떤 무인도에 상륙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15소년 표류기'처럼 소년들이 스스로 사회를 구성할 수 있다고 믿는가. <파리대왕(Lord of the Flies)>은 그 명제에 이견을 제기한다.
제목부터 끔찍한 <파리대왕>은 작가 골딩의 문학작품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문명 세계로부터 단절된 소년들이 야만인의 행위를 흉내 낸다는 것은 흥미 있게 들린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런 감정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소년들의 미신 숭배와 이성의 결여, 그것으로 말미암은 잇단 살인, 피 냄새가 난다. 이것이 두 번째 작품인 해리 훅 감독은 1963년도 배리 브룩 감독에 뒤지지 않게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잡아냈다는 평이다.

 

아카데미상 발표 직후의 극장가는 오히려 허탈감에서인지 조용한 편이다. 항상 그렇듯이 올해도 오스카는 껄끄러운 뒷소문을 많이 남겼다. 가장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산 핵심적인 사건은 스파이크 리의 <옳은 일을 해라>가 최우수 작품상, 최우수 감독상의 후보에서 조차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나마 남우조연상으로 후보 지명된 대니 아이렐로가 백인이란 사실은 사태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고 킴 베신저는 시상식 도중 투표위원회의 비 공정성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스파이크 리는 노여워 하거나 기죽을 필요가 없다. 똑같은 일이 선배 천재들에게도 일어났으니까. 스티븐 스필버그가 <컬러 퍼플>로 고배를 마신 것을 기억하는지. 이제 <올웨이즈>로 젊은 날의 총기가 사라지려 하니까 아카데미에서 불러 상도 주고 명예도 주고 하지 않는가. 80년대의 채플린, 우디 알렌도 전통적으로 아카데미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아카데미는 감동적인 '얘기'는 좋아한다. 하지만 '천재적 작가'에 대해서는 질투 내지는 시샘으로 차디 차기만 하다. 그러니 스파이크 리여, 아카데미가 그대를 부르지 않음에 감사하고 그대를 부르는 그날이 오지 않도록 기도하라. 왜냐하면 그날부터 그대는 천재가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