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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으로부터의 편지 - 제26회 뉴욕 영화제(1989.11)
뉴욕을 점령한 프랑스 영화
올해 제27회 뉴욕 영화제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다큐멘터리가 강세를 보였다. 물론 주류를 이룬 13개국에서 온 영화들은 극영화였지만 새로운 형식의 다큐멘터리가 많이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올해 뉴욕 영화제는 80년대를 마감한다는 시기적 요소와 아울러 의장이 리차드 페너로 바뀌었기에 그 성격이 예년과는 달랐다. 일례로 뉴욕 영화제는 프랑스 영화에 인색하다는 말이 있었지만 베르트랑 브리애의 <당신에게는 과분한>이 개막일 작품으로 초대되었고 베르트랑 타베르니애의 최신작 <인생, 그 아무것도 아닌>, <무슈이르> 등이 보여졌다. 또 흥행 배급업체가 배급한 영화가 유난히 적었다는 것도 다른 점이었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는 다큐멘터리의 우세. <로저와 나>는 전직 작가였던 마이클 무어가 자신의 고향의 자동차 공장이 문을 닫는 것을 코미디로 만든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코미디라니. TV가 생겨난 이래로 관객들은 전통적인 기록 영화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매일 밤 뉴스에서 모든 것을 다 보여 주는 것이다. 영화 작가들은 다른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용 자체는 사실이지만 그 구성을 픽션화 하는 것이다. "<로저와 나>는 다큐멘터리를 싫어하는 사람이 만든 다큐멘터리입니다"라고 무어 감독은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이미 토론토 영화제에서 보여진 바 있는데 다른 영화들을 제치고 관객들에 의해 가장 재미있는 영화로 뽑힌 바 있다.
뉴욕 영화제에서 세계 처음으로 선보인 프레드릭 와이즈먼 감독의 <죽음 가까이(Near Death)>는 5시간 50분의 거작이다. 흑백으로 촬영된 이 필름은 보스턴의 최신설비가 갖추어진 병원에서 환자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을 담은 것이다. 이 필름에서 특기할 사항은 전통적 다큐멘터리 양식에 따른 내레이션이 없다는 것이다. 환자는 존재하지 않고 관객들은 화면 속의 사실과 직접 마주치게 된다. 한 환자가 보여지는 시간은 길게는 1시간 가량까지 된다. 의사가 상황을 설명하는 데 환자들은 실로 담담하다. 혹은 유쾌하기까지도 하다. 하지만 내게는 죽음의 시기에 대한 선택의 문제가, 고무 튜브를 몸 안에 집어 넣어 생명을 며칠 더 연장한다거나 하는, 인간에게는 너무 힘겨워 보인다.
금년도 최고 걸작은 요리스 이벤스의 유작 <바람 이야기>
지난 6월에 죽은 요리스 이벤스의 <바람 이야기>는 서정적이고 재치 있는 마지막 작별인사이다. 1929년에 암스테르담의 폭풍우를 소재로 만들어진 <비(Rain)>란 작품은 이 자서전적인 <바람 이야기>에 꼭 어울리는 서사시이다. 1984년에서 1988년에 걸쳐 촬영된 이 필름의 도입부는 요리스 이벤스 감독 자신이 고비 사막의 황량한 모래 벌판 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파란 하늘이 창백하게 보이는 모래가 만나는 지평선에서 외로워 보인다. 하지만 카메라가 이 범상치 않은 노인의 얼굴을 클로즈업 하면서 실화와 꿈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기억 속에서 한 소년이 풍차 옆에서(이벤즈 감독은 네덜란드 사람이다.) "엄마, 나는 중국으로 날아갈 거야"라고 소리친다. 이 아이가 장차 끝없는 지평선으로 노인의 손을 이끌 자서전적인 인물이다.
중국에서 노인은 거대한 황금 불상 앞에 서 있다. 그 불상은 수 천 개의 손을 가지고 있는데 각 손바닥 위에 눈알이 굴러다닌다. 하지만 이 필름에서 가장 상징적인 존재는 북경 오페라단의 원숭이. 빨강색과 금색으로 치장한 이 원숭이를 이벤스 감독은 갑자기 조르쥬 멜리에스(George Melies) 감독의 1902년 작 판타지 필름 <달로의 여행(Le voyage dans la lune)>으로 옮겨 놓는다. 이렇든 환상적인 장면 가운데 중국의 만리장성과 고비 사막의 모래 바람에서 기계를 옮기는 사람들이 보여진다.
몇몇 필름들은 캐릭터의 감정을 비디오를 통해 표현하기도 한다. 진짜와 상상한 것과의 차이의 경향은 베르트랑 브리에 감독의 <당신에게는 과분한>이라는 서정적인 영화적 실험에서 보여진다. <당신에게 과분한>은 프랑스 영화의 정석인 남편과 부인, 정부 삼각 관계의 이야기이다. 베르나르(제라드 드파르디유)는 소위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아름답고 상류 계층인 플로렌스와 결혼해 두 자녀를 두고 있는 자동차 판매원이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완벽한 가정에 염증을 느끼고 부드럽고 평범한 여인 꼴레뜨와 정부 관계를 맺는다. 이 필름에서 꽤 많은 장면들은 등장 인물들의 환상으로 채워져 있다. 블리에 감독은 이 장면이 환상이라고 굳이 설명하고자 하지 않는다. 배우들은 카메라에 대해 직접 말을 하기도 한다. 마치 소설에서 작가가 시점을 바꾸어 1인칭 시점으로 말하는 듯이. 영화 순수주의자들은 영화는 보여져야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에릭 로메르나 알랑 르네 감독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는 실험성이 보였다.
캐나다에서 온 젊은 애톰 에고얀 감독은 <스피킹 파트>는 좀더 환상적인 작품으로 편집 자체가 줄거리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이 많이 들어가 있고 색조는 보라색, 하늘색 등 상당히 화려하면서 동시에 음울한 분위기이다. 리사는 호텔 종업원으로 영화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같은 호텔에서 일하는 릴스라는 남자를 사랑해 비디오 가게에서 릴스가 출연한 영화를 빌려본다. 릴스는 호텔에 투숙했던 작가와 관계를 맺어 스타덤에 진출하고자 하나 그게 허무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리사에게 돌아온다.
비디오 가게 주인이 리사에게 릴스가 엑스트라냐고, 대사가 없는 단역이냐고 물어보자 리사는 "말이 특별할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라고 말한다. 이 대사는 바로 감독의 생각인 듯 이 필름은 굉장히 적은 대사로 이루어져 있다. 시작 후 10여분 동안 음악만 나오고 대사는 단 2마디일 정도로.
이 밖에도 이번 가을에 일반 개봉될 뉴욕에서 유난히 인기가 좋은 짐 자무쉬의 <미스테리 트레인>.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된 후 국민당이 정권을 잡는 1940년대 대만의 가족 이야기를 담은 <비정성시/슬픈 도시>의 후 시아오시엔 감독은 이 작품으로 올해 베니스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버키나 파소라는 이름도 생소한 아프리카의 나라에서 이드리사 외드라고(Idrissa Ouedraogo) 감독이 <야바>라는 작품을 내놓았는데 마을에서 거부당한 여인이 빌라와 노포코라는 어린 애들과 친구가 되는 것을 묘사한 작품이다. 감독의 진짜 조카들이 빌라와 노프코로 출연하고 자신이 자란 마을을 배경으로 찍어 자서전적 느낌이 나기도 하는데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담아 자막이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고 일반 개봉되어 링컨센터 바로 그 앞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다.
뉴욕 영화제가 끝나는 바로 다음 날 영화제가 열렸던 앨리스툴리홀에는 '88 한국의 예술 순회공연, 땅의 소리, 춤' 행사가 치러질 계획이고 극장가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참상을 고발한 <백색건조기>에서 말론 브란도가 변호사로 등장해 주목을 끌고 있으며 데이브 그루신의 음악이 아주 근사한 영화다. 그리고 로제바딤과의 사이에서 낳은 22살 짜리 딸이 마약으로 구속되어 소문거리가 되고 있는 제인 폰다가 그레고리 펙과 주연한 루이스 푸엔조(오피셜 스토리) 감독의 <올드 그링고>라는 영화도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는 영화 중의 하나. 롤랑 조페 감독, 폴 뉴먼의 <뚱뚱이와 꼬마> 포스터가 눈에 띠기 시작해 뉴욕 영화제는 끝났어도 또 다른 새 영화들은 속속 개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