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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맥 연출부 생활
태백산맥 연출부 생활 1
"어차피 정치의식을 기반으로 한 전술 전략이란 복합적이고 다목적이게 마련이지만 이번 일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설을 진정으로 아파한 염상진의 마음이 무엇보다도 크게 작용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연출부 사람들이 목숨걸고 김범우를 싫어해 긴 토론을 가졌다.
"김범우, 회색주의자, 기회주의자, 위선자, 성(性)이 없는
사람"
왜 그렇게 보는 것일까?
"행동이 없는 사람"
I see.
J부장님의 "김범우는 이 세대(시대가 아니라)가 공감할
수 없는 인물" 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이쪽이나 저쪽이 아니면 회색분자가 되는 이 사회의 사실이 김범우를
"싫은"사람을 지나 "못된"사람으로 보게 한다.
피와 살이 없는 명분 - 이념이라 불리는 - 으로 사람을 죽이는 우익과 좌익. 내가
김범우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은 중간에 설 수 밖에 없는 김범우의 고뇌하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나의 가능성을 본 것일까. 혹은 이념이 아닌 사람으로
외국을 직접 부딪혀 본 너른 안목의 관찰자같은 모습에서 공감을 느낀 것일까.
....
김범우처럼 철저하게 혼자이었어야 하는 인물을 찾을 수 없다. 염상진은 가족과 사랑을 나눌 수 없는 상황이지만, 어려서 부모의 편애를 받았고
공산주의자가 되고는 왕도 부럽지 않은 존경과 충성과 애정을 모든 부하들에게 받는다. 벌교 근교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다른 사람들은 언급할
필요도 없고.
갑자기 Jacque 생각이 난다.(<Grand Bleu>) 여자친구도 동지들도 바다 깊숙이 잠수하려는 그
순간에는 모두 타인이고 오직 홀로 바다를 대면해야 하는 그 장면이.
93.11
Lack of professionalism
연출부 일을 하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전문화가 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전혀 전문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문서(document)를 남기지 않는다. 전임자가 일을 시키고 닥달하긴 해도어떻게 해야 할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 일을 한번만 할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물질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투자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실, 바늘 등을 종이 shopping
bag 에 넣고 다닌다.
반짇고리 하나 투자하는데도 인색. 이번 한번이라고 생각하니까 경험이 축적되지 않는다.
책임 여부의 불분명
제작발표회에서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일어나서 말하지만, 사실 옷 정하는, 옷 입히는, 옷 정리하는 사람은
다르다.
책임이 불분명 ( 혹은 내외로 다르고 : 밖으로 보이는 것과 실제와) 하니까, 책임감을 느끼고 투철히 하는데 동기가 적어지고 그
일을 해냈을 때 보람이 단연 적다.
93.11
태백산맥 연출부 생활 2
걸레를 헹구라고 했다.
벽제 유리창이 워낙 더러웠어서 세탁기 한 가득에 한스푼 넣는 '한스푼'을 세면기에 넣고 주룰러대며 빨았는데도 구정물의 색깔이 엷어지지가 않았다. 게다가 신나, 윈덱스는 알콜성 계열이라 물에는 녹지 않아 걸레의 시커먼 부분이 얼룩덜룩 남았다. 어쨌든, 빨고 남자화장실 유한락스로 청소하고 걸레는 뜨거운 비누물에 담가 놓고 나왔는데.
"그거 하는데 왜 그렇게 오래 걸려? 그냥 헹구면 되잖아."
94.1
그런데, 갑자기 감독님이 사라지셨다.나는 그 정확한 순간도 알지 못했는데, 점심약속이 있으시다고. 감독님이 나가시기 전에 끝난 사람은 외서댁, 죽산댁, 염상구, 염상진, 안성기씨는 옆에서 계속 말을 거드시더니 결국 입어 본 것은 예전에도 입어 본(그리고 맞았던)회색코트 뿐.
연출부는 물론. 그리고 단역(청주댁, 극단 아리랑...)은 모두 대기. 따로 따로 찢어져서 점심을 먹고 올라오니 1시경. 감독님은 2시까지 오시지 않으셨다. 2시 반까지도.
S 언니는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었고, J님과 Y오빠도 뭔가 열중하고 있는 듯(혹은 있는 척) 하고 있었고 연출부 2명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구석에 앉아("좌천되어" 혹은 "불쌍한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앙드레 바쟁의 책을 읽고 있었다. 옆 테이블은 자기들끼리 소곤 소곤 얘기하고 있고, 한 사람은 아예 책상위에 엎드려 자고 있고. (마치, 자율학습 시간을 연상케하는 모습으로.)
94.2
또 한 차례의 전쟁을 치루어냄.
연기자들과 단역, 그리고 오후에는 얼라들까지!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지만, 오늘을 지나보니 그들이 그렇게 일하는 방식에는 이유가 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리를 하며 일을 한다고 계속해서 접어 놓고, 묶어 놓고 했는데 그래서 오늘 쉐타와 여자 색치마, 저고리를 몇 번 다시 묶었다. (내일 헌팅가는데 여자 옷을 챙겨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은 것은 과장이 아니었다!)
오늘밤, J선생님의 강의. frame 內의 인물이 가장 먼저 보이는데 그 中 눈(eye), 손(hand)의 순으로 눈에 띄게 된다고.
무슨 소리?
나에게는 옷이 먼저 보이는데. (<개벽> 사진에서는 옷보다도 옷의 접혀진 자국이 여배우의 옷보다도, 여배우의 얼굴보다도, 감독님의 선글라스보다도, 감독님의 배보다도 그 어떤 것 보다 눈에 띄었다.)
94.2 은령은 <태백산맥>연출부에서 의상담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