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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이트>에 투영된 풀리지 않는 숙제들
엄마없이 시골 큰아버지 밑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12살 짜리 소녀와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소년의 짧은 만남을 그린 <스케이트>는 뉴욕에서 스치듯이 한 아주머니로부터 들었던 경험담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스케이트>에 출연했던 농아 정홍규는 그런 점에서 ECHO FILM의 가장 소중한 영화동지이기도 하다. 영락농아인교회에서 마난 정홍규는 농아들과 함께 수화로 성경을 공부하는 주일학교 유년부 교사이다. ECHO FILM은 뉴욕에서의 자원봉사로 익힌 서툰 수화와 손으로 글자의 모양을 그리는 지화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다면 오래 전에 들었던 작고 소박한 이야기 한 토막과 진짜 농아를 출연시키기로 결심한 이 과정까지의 그 무엇이 ECHO FILM을 사로잡았을까? 그녀는 확실한 이유가 있지만 경기도 여주에서 진행된 촬영 사흘째 되는 날에야 그 연결고리를 찾았다고 한다. "처음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왜 그토록 내 마음에 깊이 남아 있는지, 왜 그걸 영화로 만들게 되었는지 나도 알 길이 없었어요. 확신이 없어서 제목도 정하지 못하고 촬영을 시작했는데 촬영 사흘 째 되는 날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내 마음 속에 보영이가 느끼는 감정, 미안하다. 후회가 된다 언어로 표현하면 너무 피상적이 되고마는 안타까움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뉴욕에서 밀알 선교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장애인을 만났고 장애마다 배려해야 할 부분이 달랐는데 처음엔 그걸 몰라서 어색했던 부분과 미안한 감정들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숙제처럼 남아 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이 영화를 계기로 관객들이 함께 생각하고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스케이트>는 짧은 영화이지만 도입부와 마지막에 극단적인 롱케이크와 롱쇼트가 등장하며 평균적으로 한 쇼트가 1분 10초 정도 된다. 촬영을 맡은 김윤희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에서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를 촬영한 크냐진스키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그 때문인지 <스케이트>의 카메라는 자연과 인간의 경계를 뚜렷하게 나누지 않는 러시아 영화의 느낌을 많이 준다. 또한 <스케이트>의 스탭진들은 이미 충무로에서 일정한 커리어를 쌓은 노련한 기술 스탭들과 독립영화 집단 '청년'의 정지우, 김용균 감독 등이 조감독과 제작부장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스텝구성은 뉴욕대 출신인 ECHO FILM이 한국에서 한국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읽게 만든다. 그리고 애초에 저예산영화로 출발했던 <스케이트>는 16미리 카메라를 빌리지 못해서 35미리가 된 이상한 운명속에서 태어났다. "그 이야기를 하면 모두들 농담인 줄 알지만 실제로 16미리 카메라가 없어서 35미리로 찍게 되었어요. 원래는 <낮은 목소리>를 만든 '보임'의 카메라를 빌리기로 했는데 촬영 이틀 전에 강덕경 할머니가 위독해지셔서 그 약속이 취소되었어요. 결과적으로는 35미리로 찍은 점에 너무나 감사해요. 16미리였으면 담을 수 없는 랜드스케이프 프레임이었거든요. 촬영감독도 러시아에서 작업한 까닭에 한 번도 16미리를 써 본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훨씬 다행한 일이었어요."
이틀로 예상한 촬영이 나흘로 늘어나고 카메라가 바뀌면서 두배로 증가한 제작비는 지금까지 모아온 개인통장을 깰 수 밖에 없게 만들고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야 했지만 그녀로서는 현명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현장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많이 생기는 법이지만 첫 쇼트를 찍는 현장에 도착해보니 미군 캠프가 들어서 있고 헬리콥터 대여섯대가 놓여 있어 기가 탁 막혔어요. 스텝들이 농담으로 시나리오를 바꾸라는 거예요. 보영이가 미군에 납치되고 홍규가 구하는 것으로(웃음). 그래서 순서를 바꾸어 촬영하고 미군이 철수한 뒤에 찍었어요. 미국에서 현상하기로 해서 러쉬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카메라에 비디오테이프를 달아서 그날 그날로 체크하여 재촬영분을 정하는 식으로 진행했어요." 이런 식으로 <스케이트>는 저예산을 원칙으로 한 한국의 독립영화 만들기보다 매우 호사스러운 제작여건 속에서 탄생했지만 ECHO FILM은 이러한 사실이 단순한 수치로 비교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영화를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그녀의 기본자세와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스케이트>에서 그녀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음악은 중학교 2학년 때의 친구 김의석과 함께 십일년만에 뉴욕에서 이루어낸 우정의 결실이다. 훗날 영화와 음악으로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두 친구가 단지 10분짜리 영화를 위해 함께 기울인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처럼 ECHO FILM은 자신에게 주어진 관계를 가장 효율적인 힘으로 바꿀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