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같이 살 수 있을까?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사서 집에 두셨다. 영어로 씌어진, 책장 몇 칸을 차지하는 분량의 세트였다. 그 때 어떻게 하다가 그 페이지를 접하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 나지 않지만, 어떤 나라의 이름과 국기의 내용이 검정색 테이프로 가려져 있었다. 혹시 반대쪽으로부터 보면 보일까 해서 책을 들고 밝은 곳을 향해 그 페이지를 비추어가며 읽어보려 애썼지만, 이미 그런 마음을 헤아리고 친절하게 반대쪽 페이지에도 검정색 테이프를 붙여 놓았기 때문에 내용을 절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 때는 영어를 읽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북한에 관한 내용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그 나라에 대해 정확히 알 수도 없었고, 알아서도 안 되었다. 그 나라의 공식적인 이름이 무엇인지조차도… 하물며 그곳에 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고, 용감하게 그 땅을 밟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만난 이들은 그 대가를 치렀어야만 했다. (더 자세히 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것이니까…) 그것은 ‘일본에 사는 북한국적 사람들’이라고 잘못 이해되어왔던 (총련계) 조선적 재일 동포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북한은 일본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재일동포가 북한국적을 가지는 것은 법적으로 불가능하다. 과거 식민지시대에는 다 일본 국민이었던 재일동포들이 해방이 되면서 출신지를 표시하는 의미로서 조선이라는 국적을 일본 정부로부터 일방적으로 부여 받았었다. 1965년 대한민국이 일본과 국교를 맺으며 재일 동포들은 한국을 국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매년 1만 명 정도가 일본인으로 귀화하고 있다. 조선적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조선 반도에 있는 나라 중 하나만을 선택함으로 다른 하나를 부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통일된 하나의 조국의 국적을 가지는 날까지 온갖 불편을 감수하며 조선적을 지키겠다고 한다. 하지만 조선이라는 나라는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조선국적을 가지고 있는 동포들은 엄밀히 말하면 무국적자들인 것이다.) 그 동안 총련 사람과의 혈연 혹은 친분 관계로 말미암아 어처구니없이 극심한 시달림을 받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적지 않았었고, 70년대와 80년대에는 200여명의 재일동포가 유학 또는 일 관계로 한국에 왔다가 간첩이라는 혐의로 옥살이를 강요 받기도 했다.
재작년 6월 이후로 많이 달라졌다고 말들 한다. 실제로 예전 같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기도 했다. 남과 북의 지도자가 만나고, 이산가족들이 상봉하고 총련고향방문단도 4차례에 걸쳐 다녀갔다. 북한의 곡예단, 총련의 금강산가극단이 서울에서 공연을 하고 제한적이기는 해도 남쪽의 방송국이 이북에 가서 취재한 내용이 방영이 되기도 하는 분위기이다. 하지만 남과 북이 “결혼”하기까지는 깨뜨려져야 하는 불신과 편견, 두려움의 벽들이 아직도 견고하게 남아있다. 올해 초, 한 지방대학에서 총련계 학교인 조선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을 입학시키려고 했지만, 정부에서 그들이 한국에 와 사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 안이 무산되고 말았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었다. 잠깐 만날 수는 있어도 함께 살기에는 아직…이라고 높은 분들은 생각하고 계시는 걸까?
지리적 통일에 앞서 공통적인 언어, 문화, 역사의 민족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이다. 한반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뿐 만이 아니라 해외동포를 모두 아우른 한민족공동체가 형성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식민지지배의 잔재와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으며 일본에서의 차별과 조국의 버림에 상처 받은 재일 조선인들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정체성을 회복하고 그들의 그들 됨으로써 가능한 일들에 대한 비전과 꿈을 품게 된다면, 그들은 일본과 조국을 잇는 그리고 남과 북을 잇는 평화의 다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서희연은 투자금융회사에서 높은 연봉을 받으며 일하는 M&A 스페셜리스트. 류상인은 총련계 학교인 조선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재일동포 3세이다. 희연은 아버지의 직업(영사) 때문에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성장했는데, 일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상인과 사귀었던 적이 있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할 정도로 무척 사랑했었지만, 희연의 아버지가 두 사람을 강제로 갈라놓고 희연을 미국으로 보내 헤어지게 되었었다.
희연은 졸업 후 뉴욕 오피스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오사까 브랜치에서 중요한 딜이 있어 파견 받게 된다. 그녀가 맡게 된 프로젝트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타마무라’라는 회사를 부분적으로 인수하는 것이다. 90년대부터 계속된 불경기로 인해 회사의 악화된 재정상태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채권단이 회사를 조각내서라도 팔기 위해 내놓은 것이다.
상인은 자신이 담임을 하고 있는 중급부 3학년에 김영치라는 학생이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아 영치의 아버지가 경영하는 파칭코에 찾아갔다가 영치가 고등학교부터는 일본학교에 가려고 매일 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것을 듣는다. 상인은 학원에도 찾아가 보는데 영치가 자신의 본명으로서가 아니라 통명(일본이름)으로 등록해 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치는 자신은 일본에 살고 있기 때문에 굳이 우리말을 배우며 조선사람임을 고집하며 살아야하는지 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희연은 영사관 주최의 미술전람회 오프닝 리셉션에서 상인과 사귀고 있을 때 함께 어울려 친하게 지내던 래영의 오빠인 승일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승일으로부터 래영의 연락처를 받고 미국으로 떠난 후 7년 만에 처음으로 래영을 만나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눈다. 조선학교 부설 유치원에서 교원으로 일하고 있는 래영은 곧 교내마라톤대회가 열리는데 장소가 희연의 사무실과 가까운 오사까성 공원이니 한번 들려달라고 부탁한다. 희연은 마라톤경기를 보러갔다가 그곳에서 상인을 만나게 되어 당황한다. (상인과 래영은 같은 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은 경기가 끝난 후 잠시 이야기를 나누지만, 희연 쪽에서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한다.
‘타마무라’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결과를 유리하게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희연은 승진제안을 받는다. 진행중인 딜이 마무리되는 대로 뉴욕에 있는 오피스에 돌아가 디렉터가 되는 내용의. 희연은 그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희연은 허리디스크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 가족과 관계가 좋지 않은 희연은 상인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한다. 상인은 희연이 병원에 가는 것이나 장을 보고 요리를 하는 것 등을 도와준다. 희연은 상인에 대한 고마움에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되고, 두 사람은 아직도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상인은 방학동안 영치에게 장고를 가르쳐준다. 영치는 처음에는 손에 물집이 잡히고 장단이 익혀지지 않아 힘들어하지만 열심히 연습해나가며 조금씩 우리 장단의 멋을 느끼게 된다. 겨울방학이 끝나고 열린 예술발표회에서 영치는 무대 위에서 그 동안 쌓은 기량을 마음껏 드러낸다.
희연은 상인에게 자신이 뉴욕으로 갈 때 함께 가자고 제안한다. 그가 미국에 가서 공부하는 동안 자신이 후원하겠다고… 희연은 상인이 사회에서 인정도 받지 못하고 보수도 너무나도 적은 학교에서 교원을 하고 있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상인은 자기 스스로 고생스러운 길을 선택한 것이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평생을 민족교육에 헌신하겠다고 말한다. 두 사람의 서로 다른 생각의 차이는 좁혀지지 않고 결국 크게 말다툼을 하고 헤어지게 된다.
시간이 흐르고 희연의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출근할 수 있게 된다. ‘타마무라’와 계약서에 싸인을 하고 호텔에서 성대하게 클로징 세레모니가 벌어지는데, 희연은 얼굴은 웃고 있어도 어딘가 마음 한 군데가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어느 일요일, 래영이 희연을 방문한다. ‘오빠에게 들었어요’라고 말하는 래영에게 희연은 아무래도 상인에게는 총련조직에서 함께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어울릴 것이라고 말한다. 래영은 그 말을 듣고 희연에게 ‘오빠가 언니와 함께 있을 때처럼 행복해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라고 말해준다. 희연은 래영에게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지만 래영은 1주일에 한번씩 돌봐줄 사람이 없는 1세 할아버지, 할머니를 방문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찍 떠난다.
그 날 밤, 상인에게서 한밤중에 전화가 걸려온다. 래영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즉사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희연은 그 전화를 받고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을 새운다. 며칠 후 희연은 래영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상인도 그 자리에 왔지만, 희연과 눈이 마주쳤을 때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한다.
3월이 되어 상인의 학교에서 졸업식이 있게 된다. 영치는 결국 일본고등학교에 가기로 하지만 통명을 쓰지 않고 자신의 본명으로 학교에 다니기로 결정한다. 상인은 영치에게 일본학교에 가더라도 당당하게 조선사람으로 살고 동포의 권리를 위해 큰 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봄꽃이 필 무렵, 희연은 래영의 무덤에 간다. 7년 전 상인으로부터 받았던 반지를 끼고. 래영의 무덤 비석에 물을 뿌려 깨끗이 닦고 있는데 상인이 나타난다. 두 사람은 래영을 그리워하며 이야기를 나누는데, 상인은 희연의 손가락에 끼여져있는 반지를 본다. 두 사람은 무덤을 뒤로하고 함께 길을 걷는데 상인이 희연의 손을 잡는다. 상인과 희연은 그렇게 손을 잡은 채 벚꽃이 만발한 길을 걸어간다.


남한, 북조선, 그리고 사랑.
NDIF 참가한 조은령
NDIF 참가차 부산을 찾은 조은령씨(29). 아이들 세계의 작은 화해를 포착한 단편 <스케이트>(1998)로 칸영화제 단편경쟁부문에 초청됐던 그가 이번에는 정치와 역사의 그물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하나>라는 제목의 시나리오 작업 중인 이 장편은 조총련계의 조선학교 남자교사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성장한 여성 M&A 스페셜리스트의 러브스토리. 지나해 광복절. <한겨레>에 난 조총련 관련 기사를 보고 구상했단다. 열일곱살 때 혼자서 미국행 비행기를 탄 이후 줄곧 뉴욕에서 살아온 조은령씨는, “뉴욕에 있을 땐 한국 시골얘기를 했고, 한국에 있으면서는 또 일본 얘기를 하게 됐다” 며 살포시 웃음. “일본에서 촬영해야 하고, 조총련계학교에서 남한 출신에 갖는 경계심 등 벽이 많지만, 꼭 해볼 생각”이라고.
2001 부산영화제 관련기사


NDIF Presentation
이 영화는 love story이고, 결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결혼식이나 결혼생활이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20 몇 년을 전혀 다른 장소, 문화, 환경, 체제에서 살아왔던 두 사람이 남은 인생의 여정을 함께 걷기로 결정하는, 그런 이야기라는 의미에서 결혼에 관한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 때 일본으로 유학을 간 희연은 같은 대학에 다니던 재일동포 친구의 소개로 여름방학 중에 조선학교에서 벌어지는 ‘납량모임’ - 그 지역에 사는 동포들이 모여서 고기를 구워먹는 등 식사도 같이 하고, 조선학교 학생들과 가무단의 공연을 보기도 하는 그런 모임에 호기심 반으로 참석했다가 그 자리에서 상인을 만나게 됩니다. 스무 살을 갓 넘은 대학생이었던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들에게는 그녀가 대한민국 국민이고 그가 조총련 학교인 조선대학교 학생이고 장차 조총련에서 전임일꾼인 조선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려 한다는 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희연의 가족, 희연의 조국은 두 사람의 관계를 용납할 수 없었고 희연의 아버지는 희연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두 사람의 관계를 강제적으로 갈라놓고 희연을 미국으로 보내버립니다.
7년의 시간이 지나고 희연은 M&A 스페셜리스트가 되어 일본회사를 인수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기 위해 일본에 오게 되고 상인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과거에 헤어졌던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채 바쁘게 자신의 삶을 살아오던 두 사람, 한 사람은 투자금융회사에서 몇 만불의 연봉을 받으며 일하고 있고, 한 사람은 북한을 조국이라고 생각하며 조총련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데, 이 두사람이 과거의 사랑과 상처에 맞부닥뜨려졌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좀 더 자세한 줄거리는 PPP 책에 나와 있습니다.)
저는 작년 12월부터 4번에 걸쳐 일본에 갔다 왔습니다. 일본에서의 취재는 주로 남자주인공인 상인의 배경이 되는 조선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제가 그동안 취재하며 촬영한 것을 중심으로 2분 30초 정도의 영상물을 준비했습니다.
(비디오를 보여준 후)
이 영화의 차별점과 강점(마케팅 포인트)을 몇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멜러 장르의 차용으로 대중성 확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재의 성격상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재일동포들, 특히 조선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삶에 대해 다루어질 것이고, 정치적인 언급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겠지만 스토리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love story이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플롯을 따라가는데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쉽지만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것을 극복하고 사랑하기로 결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보편적인 질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신선한 소재와 배경을 들 수 있습니다. 조선적을 지키고 있는 재일동포들이나 조선학교에 대해서는 영화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었기 때문에 이런 점이 오히려 흥미를 유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적으로, 조선적이라는 것은 해방 후 일본 정부가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 동포들에게 임의적으로 조선반도 출신자임을 표시하기 위해 준 국적입니다. 하지만 사실 조선이라는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국적이라기보다는 출신지를 표시하는 의미에 지나지 않고, 엄밀한 의미에서는 무국적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재일동포들은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는 이상 조선적으로 살아왔었지만 1965년 한일협정 발효 후 남한 정부가 대부분 제주도, 경상도 등 남한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재일동포들에게 ‘한국’으로 국적을 바꾸도록 요구하며 ‘줄서기’를 강요하였었습니다.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동포들은 ‘북한’ 국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고 신문에도 그렇게 나오지만 사실 북한국적이라는 것은, 북한과 일본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법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단순히 북한지지자로 인식되어온 조선적 재일동포들 중에는 두 쪽 난 조국의 어느 한쪽만을 인정하고 다른 한쪽을 부정할 수 없다고 하여 그 누구보다 통일에 대한 염원을 안고 갖은 불편과 차별을 감수하며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사실 이들이 버틸 수 있는 구심점이 되었던 것은 우리말과 글을 배울 수 있게 해주었던 조선학교였습니다.
세 번째로는 북한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들 수 있습니다. 조선적 재일동포들은 법적으로는 북한국적이 아니지만 심정적으로는 북한을 조국이라고 부르고 자신들은 공화국의 해외공민이라고 생각하고있고 그러면서 고향은 대부분 제주도, 경상도 등 남한인 경우가 많습니다. 여태까지 한국영화에서 그려진 북한 사람들의 이미지를 보면 <인샬라>, <쉬리>, <간첩리철진>이나 휴머니즘의 옷을 입은 <공동경비구여 JSA>에 이르기까지도 군인이나 간첩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북한 사람에게서 군복을 벗길 시대가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성공적으로 북한인을 우정의 대상으로 그려낸 것을 넘어 이제는 사랑의 대상, 더 나아가 함께 살기로 결정하는 대상으로 볼 수 있는 때가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러 번 조선학교를 방문하면서 실제 조선학교에서 촬영하고 조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재일동포 4세들을 출연시키려고 추진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능케 된다면 <책상 서랍 속의 동화>나 <집시에서의 시간>에서처럼 독특한 도큐적 재미와 즐거움이 어우러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내년에 촬영을 시작하고 후년인 2003년에 개봉하게 된다면 6.25 휴전 협정 후 5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마케팅 이슈화에 유리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매스컴의 호의적 관심 유도 가능?)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


2001.01.03
안녕하세요.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서울에 돌아와서 K의 H작가를 만났고 타쯔미소학교의 비디오가 필요하시다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H작가의 말이 타쯔미소학교에서 찍은 분량이 그리 많지 않다고 하더군요. 어쨋든 VHS로 복사본을 받아서 전달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언제까지 필요하신 것인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1월 중에 1년에 한 번만 있는 행사가 많은 것 같아서 고민하던 중 다시 오사카에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 주에 (목요일이나 금요일) 가려고 비행기를 예약했습니다. 수업을 진행하시는 선생님들게 불편을 드리지 않는 선에서 참관을 허락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답신은 위에 적혀있는 이메일주소로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1월 3일 서울에서, 조은령 올림


Memo1
“To fully experience the tragedy of Titanic, to be able to comprehend it in human terms, it seemed necessary to create an emotional lightning rod for the audience by giving them two main characters they care about and then taking those characters into hell.” (James Cameron from James Cameron’s TITANIC)
이 영화를 준비하면서 친구가 된 교또에서 공부하고 있는 유학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그 친구가 친하게 지내는 교수님이 고등학교 3학년 때 유신을 반대하는 유인물을 만들었다가 안기부로 끌려가서 어려움을 당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일본에서 총련 전임일꾼으로 일하는 사람으로부터 극히 개인적인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받았을 때 그 내용이 아무런 정치적인 것을 담고 있지 않았었음에도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 편지를 갈기갈기 찢어 기내 화장실에 버린 적이 있으시다고 한다. 변기에 조각조각난 편지를 버리면서도 영화 <백야>의 내용이 생각나 혹시 그들이 이것을 발견해 (그리고 복원해) 문제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셨었다고… 과거에 무시무시한 위협과 고통을 몸으로 겪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생생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얼마나 시달리게 될 지를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희연이 오사카로 돌아와 상인을 다시 만나게 되고, 허리가 아파 쓰러지는 사건을 통해 서로가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상인과의 관계에 commit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종류의 두려움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 상인과 사귀었을 때 둘을 갈라놓기 위해서 희연의 아버지가 동원했던 위협과 폭력이 매우 실제적이었고 무서웠었기 때문에 현재에도 그 두려움은 존재한다. 이런 concept를 어떻게 이야기로 엮을 수 있을까가 지금 가장 고민하는 지점이다.
아버지의 위협, 그로 인한 두려움이 real하려면 아버지의 캐릭터가 real해야 한다. 그러면, 희연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었는데, 오늘 신문에 JP가 했다는 말을 읽어보니 그의 한 마디로 희연의 아버지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6.25때 동기생 1600명중 430명이 전사했다. 내가 국립묘지에서 명복을 빌면서 내 이름 앞에 생잔자(生殘者)라고 썼다. 북한에 가서 김일성 밀랍인형 보고 눈물흘리는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지하에서 뭐라하겠어…”
희연의 아버지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관념적인 성질의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그로 인해 저쪽에 대한 적대감과 미움도 실제적이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눈 앞에서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주 어렵게 성장했을지도 모른다. 빽도 없이 돈도 없이 살아남았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을 엄격하게 채찍질해가면서 노력하며 살아온 것이 굳어져 원칙에 철저하고 타협의 여지가 없는 성격이 되었다. 그런 그가 빨갱이를 집에 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것은 타협할 수 없는 지점이다.
남한=자유민주주의, 북한=공산주의라는 관점이 그에게는 아무 모순 없이 성립이 된다. 그의 캐릭터를 통해 “내면화된 분단의식”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으면 한다. 예를 들어, 대학생들이 혹은 노동자들이 데모를 하는 것에 대해서 그는 아무 의심의 여지가 없이 그런 행동은 위쪽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들이 우리 사회를 교란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체화된 반공주의라고나 할까. 나이 드신 분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정말 세대차이를 느낀다. 같은 지붕 아래 살면서도 느끼게 되는 괴리감… 일본에 있을 때 재일동포 3세인 사람으로부터 “(당신은) 분단 3세이니 그런 (위에 예를 든 것과 같은)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않냐”고 질문을 받았던 적이 있다. 분단 3세… 내 자신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말이 낯설다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다른 사람을) 재일동포 3세, 재미동포 2세라고 부르는 것에는 익숙했었지만… 어쨋든 매우 신선한 질문이었다. 나는, 나의 세대는 과연 자유롭게 사고하고 있는지. 생활 속에 깊이 잠복되어 있다보니 그 실체가 잘 감지되지 않는 분단 이데올로기의 문제에서… 생각해보면 생각해볼수록 부정적인 답이 나오는 듯 하다. 기억을 거슬러가보면 고등학교 때 ‘교련’이란 과목을 배워야만 했던 것이 생각난다. 나는 여자라서 삼각대 묶는 방법, 방독면 쓰는 방법 등에 대해 시험을 보았지만 남학생들은 총 끝에 달려있는 칼로 ‘적군’을 찌르고 손목을 돌려 칼을 빼는 동작을 연습하고 손목을 얼마나 잘 돌리느냐에 따라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쓰다보니 또 하나의 연출의도 비슷하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지금 가장 고민하고 있는 지점이 어떤 부분인지는 전달되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