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조총련계 재일동포들은 일본에 사는 북한국적의 사람들이라고 오해 되어 왔다. 조총련계 동포들 중 많은 이들이 ‘조선’이라는 국적을 가지고 있는데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 지성인이라는 이들이나 기자들마저도 이 ‘조선’이라는 국적이 ‘북조선’의 그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하지만 역사를 조금만 공부해보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던 시기,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일본으로 강제연행 되어 끌려 갔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에 남아있던 우리 동포들은 ‘일본인’이란 법적자격을 박탈당하고 일방적으로 ‘조선’이라는 국적을 부여 받았는데, 이는 실제적인 차원에서의 국적이라기보다는 출신지를 표시하는 의미이다. 거의 100년 전 이 지구상에서 사라진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적을 지키고 있는 재일동포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무국적자들인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 발효로써 재일동포들은 대한민국의 여권을 가지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 정부가 요구하는 자격에 부합한다면 일본인으로 귀화하여 일본의 여권을 가지는 것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만 명에 달하는 재일동포들은 온갖 불편과 차별을 이겨내며 조선적을 지켜 나가고 있다. 그들이 반세기가 넘도록 버텨올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서 피상적으로 생각하듯이 북한체제에 대한 맹목적 충성 때문은 아니다. 한반도에 있는 두 나라 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하나를 부정할 수 없다는 신념, 하나된 조국의 국적을 가지게 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강한 통일에 대한 염원이 이들에게 반세기를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리고 조선학교에서 일본 정부의 탄압과 재정의 어려움과 싸워 오면서도 꿋꿋이 민족교육을 지켜 왔던 것이 또 하나의 큰 구심점이 되었다.
일본에서의 우리 동포들의 민족교육에 대해 공부하면서 지금의 조선학교의 모체가 해방 직후에 일본 전역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났던 국어강습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쟁 직후에 아무 것도 갖추어진 것은 없었지만 조국을 되찾은 기쁨으로 가득 차 빼앗겼던 우리 말과 글을 아이들에게 배워 주고 일본에 살고 있어도 조선사람이라는 긍지를 심어 주었던 국어강습소의 정신이 조선학교에서 반세기가 넘도록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조선학교의 교육의 역사는 남과 북의 문제를 떠나 일본에 사는 우리 동포들이 어떻게 대를 이어 타향에서 우리 민족의 말과 글, 정신과 긍지를 지켜 왔느냐에 대한 자랑스러운 기록이다.
사람을 만나서 사귀게 될 때 처음에는 그 사람의 외모가 눈에 뜨인다. 키가 작다든지, 안경을 쓰고 있다든지, 얼굴이 까맣다든지, 이빨이 덧니라든지… 하지만 그 사람과 친구가 되어 더 알아가게 되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들, 그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 그 사람의 꿈 등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된다. 조선학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태까지 조선학교에 대해 다루어진 방송이나 기사들을 보면 조선학교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때 보이는 것들? 학생들의 치마 저고리 교복이라든지, 교실마다 걸려 있는 초상화 같은 것에 시선이 집중되는, 피상적인 차원의 이해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극장용 다큐멘터리의 선례가 극히 적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르포르타주 성격의 방송용 다큐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나는 시간을 충분히 들여서 공부하고 제작해 스크린에 올릴 만한 가치가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 한국사람들이 보더라도, 재일동포들이 보더라도, 한민족이 아닌 관객들이 보더라도 공감할 수 있을 만큼의 완성도가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조선학교의 피상적인 겉 모습을 넘어서서 조선학교에 다니고 있는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의 꿈을 영화에 담고 싶고, 그 아이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들이 어떠한 대가를 치루면서 학교를 지켜오고 민족을 지켜왔는지 그 생생한 목소리를 기록하고 싶다.
지리적 통일에 앞서 공통적인 언어, 문화, 역사의 민족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과 해외에 살고 있는 동포들의 마음이 하나로 엮어졌던 것을 경험했던 것처럼 스포츠나 예술에는 국경과 이념의 장벽을 넘어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잇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이제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가려고 하는 이 영화가 한국과 조선적 재일동포들을 잇는 다리가 되고 자랑스럽게 우리 민족학교를 일본 땅에서 지켜 오신 분들에게 작은 선물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2000년 여름 ‘실크로드 2000’ 사역으로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땅을 한 달 동안 밟았던 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니 어쩌면 ‘실크로드 2000’ 사역에 대해 처음 들었던 99년 가을 ‘부흥 2000 콘서트’가 내 마음에 처음으로 이 프로젝트에 대한 씨앗이 뿌려졌던 때인지도 모르겠다.
남북이 하나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2000년대를 꿈꾸며…
그 날 그렇게 함께 기도하며 북한에 대한 마음이 심겨졌었다. 그런데 며칠 후 주일예배를 드리는데 O 목사님이 설교 중에 북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한 주에 두 번씩이나 북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며 하나님께서 북한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도록 인도하신다고 느끼고 북한을 품고 중보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2000년 여름, 실크로드에서 보낸 한 달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민족’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만든 시간이었다. 나는 6년 넘게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지만 워낙 한국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타향에서 우리 나라 사람을 만났다고 감격스럽다거나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특별히 없었다. 하지만 낯선 중앙아시아 나라의 시장에서 김치를 (우리가 먹는 김치와는 너무 달라 샐러드에 가깝게 보이기는 하지만) 팔고 계시는 고려인 동포들을 만날 때 혹은 지하교회에서 고려인 형제 자매들과 함께 예배 드릴 때 느끼게 되는 감정은 분명 미국이나 유럽 같은 나라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뜨거운 그 무엇이었다. 한 번은 4명이 한 조가 되어 시내로 땅밟기기도를 하러 나갔는데 시장 근처에서 영어를 할 수 있는 러시아인들과 고려인 동포 몇 분을 만나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중에 세르게이 임이란 이름의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마침 우리 조에 임씨 성을 가지고 있는 형제가 한 명 있었다. 세르게이 임 할아버지는 그 형제가 자신과 성씨가 같다는 것을 아시고는 ‘임’ 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여권을 몇 번이나 보여 주시면서 그 형제를 수도 없이 거듭하여 포옹하셨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난다.
사실 나는 나의 한국인이란 아이덴티티에 대해 그다지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내가 한국인이란 사실이 너무 싫어서 숨기고 싶다거나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원망스럽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한국인인 것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태극기를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이 한 몸 바쳐야겠다는… 그런 생각도 별로 없었다. 외국에 오래 살았어도 워낙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뉴욕에 있었기 때문에 나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실크로드 2000’ 사역은 우리 민족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되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실크로드 2000’ 사역은 전세계적인 기도와 연합의 네트워크였지만 실제적으로 한국의 인터콥과 예수전도단을 주축으로 한국 사람들이 치러 낸 대형 행사였다. 외국 사람들이었더라면 2년 이상을 준비했을 것이 틀림 없는 큰 규모의 사역이었지만, 우리들은 한국 사람 특유의 ‘밀어붙이기 정신’으로 단 몇 개월 만에 그 사역을 준비하고 치러 냈다. 물론 그렇게 급하게 일을 진행하면서 미숙하고 부족한 점도 많았지만,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그 한 가지의 이유만으로 몇 천 명의 한국 사람들이 자신의 재정과 시간을 들여서 중앙아시아에 모인 것을 보며 한국 교회의 저력과 희망을 보게 되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 사역을 준비했던 우리들에게 주셨던 환상이 있다. (이 사역을 위해 중보 하시던 어떤 장로님이 꾸신 꿈의 내용이라고 한다.) 먼 동쪽의 나라에서부터 흰 옷을 입은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실크로드의 나라들을 따라 씨를 뿌리며 행진하는데 그 곳은 원래 길이 아닌 광야이지만 수없이 많은 이들이 걸음으로써 길이 만들어지는… 그런 비전이었다. 예전에는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 하는 사람들에 대해 듣게 되면 (주로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교회에 다니고 싶지 않다’라고 덧붙인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좀 교회에서 골라 내시지… 전도하기 힘들게 왜 그냥 놔두시지…’ 라고 생각하곤 했었는데, 실크로드에서의 경험을 통해 왜 하나님이 구원 받는 자들의 수를 한반도에서 그토록 많이 더하셨는지 이해 되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만을 위한 축복이 아니라 중국과 몽골, 그리고 실크로드 상의 많은 나라와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가장 미약하고 단점 많은 우리 민족을 하나님의 일꾼으로 택하신 것이다. 전쟁이 너무 급하기 때문에 자질도 부족하고 훈련도 되지 않았지만 일단 군사를 뽑아 모아 놓으신 하나님의 급한 사정이, 그리고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큰 기대가 가슴 절절히 느껴졌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아시아의 관문으로 우리 민족을 선택하셨는데 지금은 분단되어 있어 대륙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하나님의 뜻이 지체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통일’에 대해서도 예전과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이야기를 하는데 왜 일본에서인가? 내 자신에게도 수 없이 물어보았던 질문이다. 우선 일본은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이민사에 있어 둘도 없는 독특한 곳이다. 미국 같은 나라에는 남한 사람들이 이민을 갔고, 중국이나 중앙아시아의 동포들은 반대로 북한과 긴밀한 교류가 있었지만, 일본은 남한 쪽에 편향된 사람들과 북한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인민기가 휘날리는 조선 학교 바로 앞의 집에 태극기 가 그려진 명패가 붙어 있는 데가 일본이다.
작년 2월에 1주일동안 ‘일본을 위한 단기중보기도학교’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일본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나라가 분단되는 데 있어서 그 씨앗을 제공한 것이 일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제 시대에 교회가 신사 참배를 함으로 한국 교회가 분열되었고 그 후유증과 상처는 해방되고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교회에 생채기로 남아 있다. 일본은 정치적으로도 한반도의 분단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현대사를 나름대로 공부하며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나라를 둘로 갈라 놓은 일본 땅에서 둘이 하나 되는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통일이 되려면 먼저 해야 할 숙제가 있다.’ 작년 4월 예배/중보기도/영적전쟁 세미나에 참석했을 때 주강사였던 Paul Hawkins를 통하여 주셨던 말씀이다. ‘그 숙제란 일본을 용서하고 일본과 화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월드컵을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한다는 것은 통일이란 거대한 시나리오의 한 씬인 것처럼 느껴진다.)
이 프로젝트를 마음에 두고 처음 일본으로 향했던 것이 2000년 12월이었는데 그 때 추위로 고생을 많이 했다. 우리 나라보다 기온이 높다고 옷을 얇게 가져갔던 까닭도 있었지만 그게 이유의 다는 아니었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가슴 한 가운데가 얼어서 감각이 무디어진 느낌… 울고 싶지만 울 수 조차 없는 답답한 심정… 얼굴은 웃고 있어도 마음은 늘 슬픔으로 젖어 있는 것 같고 나의 나 됨이 견딜 수 없이 싫은… 그러한 느낌들이 떨쳐지지 않는 것인지, 예배를 드려도 오히려 더 무거워지는 듯 해 고통스러웠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 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그들의 오랜 슬픔을 알고 있다. 이제 내가 그들의 슬픔을 바꾸어 기쁨의 춤을 추게 하겠다.’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일본으로, 조선적 재일동포들에게로 보내셨는지… 한 번은 일본에 있는 동안 일주일 내내 통곡하며 기도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는 좀 장기간 일본에 머물렀기 때문에 한 달이 넘어가면서 지치고 힘들어서 그런가보다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닷새 째 되는 날 역시 통곡하면서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50년 동안 아무도 우리에게 와 주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총련 사람들을 많이 만나면서 내가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교회 다니는 사람을 평생 처음 만나 봤어요’라는 말이었다. 복음을 평생 처음 들어보았다는 것도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평생 처음 만났다는 사람들… 한국 선교사가 만 여 명에 이르고 사역하고 있는 나라가 160 여 개 국가라는데 우리는 그 동안 이데올로기의 벽에 갇혀 바로 옆에 위치한 나라,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했었다. 어쩌면 이들은 오지에 살고 있는 미전도 종족들보다도, 북녘 땅의 동포들보다도 더 우리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하나님, 이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꿈이 무엇입니까?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것을 이야기하려 하는데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영화를 만드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여쭤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을 부어 주셨다. 재일 조선인들은 남한에서 거절 당했고 (그들 중 대부분은 고향이 남쪽인데도) 북한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았었고, 일본에서도 조국에서도 상처를 받아 왔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새 세대를 일으키실 것이며 구속된 그들은 일본과 조국을 잇는, 남과 북을 잇는 평화의 다리가 될 것이라고…
그 동안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꿈, 하나님의 마음은 너무나도 거창한데 내 자신을 보면 너무 가진 것이 없어 좌절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절망할 수 없을 만큼 절망한 바로 그 순간마다 분명하게 내 영혼에 말씀해 주신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다.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찌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예레미야 1:7~10)


1990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그 날 이후에도 이 지구상에는 유일한 분단의 국가가 남아 있다. 아직도 쉽게 오갈 수 없는 같으면서도 다른 나라, 바로 코리아이다. 동북아시아의 끝자락에 위치한 이 작은 나라는 이데올로기의 장벽을 아직도 허물지 못한 채 남과 북으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바다를 건너면 유일하게 남과 북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세계, 일본 땅이 있다.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대부분 일본의 제국주의가 한창 기승을 부릴 때 노역과 군역을 위해 강제 이주 당한 이들의 후손들이다. 일본의 한국 이민자들은 한국 국적, 조선 국적 그리고 귀화하여 일본 국적을 가진 이들로 나뉘어 있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나라는 1910년에 이미 지구상에서 없어졌음에도 조선 국적을 가진 이들은 분단 전의 조선을 고향이라 여기며 그 국적을 지키고 있다. 물론 그들은 남한이 아닌 북한의 소속으로 총련계라 불리기도 한다.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인으로, 조선인으로 그리고 일본인으로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 국적과 이념은 다를 지라도 그들은 통일된 조국의 role model이 되어 차별과 불평등의 사회적 현실 속에서 또 하나의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다. 그들의 사회 속에는 지난 50년간 온갖 핍박과 경제적인 고통을 이겨내며 지켜온 ‘민족학교’가 있다. 본명과 통명의 선택을 강요받는 한인들에게 이 민족학교는 타인에게서 강요된 열등감을 극복하는 장소요, 정체성을 회복하는 치유의 공간이며 자신의 뿌리를 찾는 시간으로의 여행이다. 그리고 이 곳은 낯설은 언어로도 호쾌한 웃음이 들리는 역동적인 곳이다.
일본학교의 진학을 통해 더 나은 경제적인 보장과 소수 민족의 차별을 벗어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은 자식을 민족학교에 보낸다. 그 부모의 부모들이 입었던 하얀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고 오로지 한국어로만 말하고 들어야 하는 그곳에서 한인들은 웃음을 찾고 내일을 건다. 그래서 일본 어디에도 없을 낡고 초라한 민족학교의 건물에선 삐그덕 거리는 불협화음조차 최고의 하모니로 들리는 오케스트라 같은 힘과 열정이 느껴진다.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2시간을 가서 후쿠시마 현 고리야마 역에 내리면 후쿠시마조선초중급학교가 나온다. 정문이나 담장은 없고 주렁주렁 열매 달린 나무들이 그 학교의 교정을 대신하고 있다. 전교생의 70%가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30년이 넘은 조선학교다. 매년 3월(?)이 되면 이곳에선 눈물의 입학식이 치러진다. 이제 갓 6살이 넘은 아이들이 부모의 곁을 떠나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부모도 울고, 자식도 울고…도대체 세계 어느 곳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이리 서글프단 말인가. 자기가 누구인지 뿌리를 알게 하기 위해선 민족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언젠가 자식들이 크면 부모의 생각과 마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발걸음을 옮긴다. 마치 그들의 부모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숙사의 복도를 순찰하는 선생님을 발견하면 아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달려와 안긴다. 선생님이 부모가 되는 독특한 사제의 정이 온 교내에 향기가 된다. 선생님들 역시 초급학교부터 조선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십 수년을 기숙사 생활을 했슴으로 누구보다 아이들이 마음을 잘 안다. 초급학교 졸업식이 입학식만큼 눈물바다를 이루는 것도 바로 선생님들의 헌신과 사랑 때문이다. 여느 학교에서는 볼 수 없는 감동이 있는 것이다.
오늘은 저녁 식사 후 체육관에서 운동시합이 있다. 조별로 치러지는 농구시합.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신이 나게 뛰어 다닌다. 그런데 무지하게 부지런히 움직이고 수 없이 패스가 오고 가는데도 슛이 없다. 자기가 해도 될 슛을 자꾸 동무들에게 패스하며 양보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우승도 개인적인 성적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운동 자체를 즐기며 학교에서 배운 공동체 의식과 협동심만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은 성적표를 나누어주는 날에도 볼 수 있다. 성적표를 받음과 동시에 학생들은 자신의 석차보다는 우리 반의 석차에 먼저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성적이 안 좋은 동무를 위해 조를 짜고 시간표를 세워서 함께 공부하여 함께 성적을 올리려고 애쓴다.
학생들의 이러한 성향은 분명 민족학교 선생님들의 특별한 교육 이념 때문이다. 본국에선 아직도 남과 북의 사상과 제도가 대립하고 통일의 의미도 퇴색되어 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까지 나오는데 이곳의 선생님들은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개인적인 숙원 사업으로까지 여긴다. 남과 북의 정치를 초월한 교육을 하고 싶다는 선생님들. 어린 자식을 기숙사까지 보내서 민족을 찾고자 하는 부모들. 그리고 일본 땅에서 차별과 냉대 속에 사는 소수민족이 아니라 통일의 역군이 되겠다는 아이들.
그래서 일본의 한인들에겐 꿈이 있다. 분단된 조국이 하나가 되는 꿈. 일본 사회 속에서 당당한 한국인이 되어 개인적인 행복만이 아닌 다수의 행복을 추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꿈 말이다. 오늘도 민족학교의 기숙사엔 해가 떠오른다. 그들의 가슴만큼이나 뜨겁고 정열적인 태양이 오늘도 높이 높이 솟았다.


한국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재일 동포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영화
한국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이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고 동포 분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다’라고 느끼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재일동포 분들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0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국에서는 8.15가 다가오면 재일동포에 대한 특집이 다루어지곤 하는데, 그 즈음 우연히 어떤 신문에서 ‘총련 VS 조총련’이란 제목의 그리 길지 않은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글의 요지는 한국에서는 ‘조총련’이라고 하면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어둡고 왜곡된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조총련’이란 호칭은 아무도 사용하고 있지 않으며 그 대신 ‘총련’이라고 불려지는 그 단체는 동포들의 인권과 생활을 위해 크게 힘써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저의 눈길을 끈 대목은, 총련 동포들이 온갖 불편과 차별을 감수해가며 버텨 올 수 있었던 근간에 일본 정부의 탄압과 재정의 어려움 등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반세기가 넘도록 꿋꿋이 지켜온 민족교육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텔레비전에서 민족학급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보게 되어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 그리고 일본에서의 민족교육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2000년 12월, 이 해가 가기 전에 일본에 가서 직접 보고 경험하고 판단을 내려야겠다고 결심하고 오사카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 동안 몇 개월 가량 외국어 학원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아이디어 스케치, 자료조사 등을 했지만 과연 일본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살아 본 적이 없다는 점,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싼 나라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제작비도 국내에서 촬영하는 것보다 2배 이상 들 것이 자명하다는 점 등이 우선 난점으로 예상되었으나 사실은 그 무엇보다도 참으로 지난하고 복잡한 재일동포 분들의 역사와 현실을 영화에 올곧게 담아낼 수 있을지 염려 되었습니다.
일본으로 떠나기 전 민족학급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 제작팀으로부터 민족학급 선생님과 민족학급에 대해 논문을 쓴 한국 유학생을 소개 받아서 일본에서 머무른 2주일 동안 여러 학교를 방문하며 민족학급 수업 현장을 참관하였습니다. 학기말이었기 때문에 수업다운 수업은 진행되지 않고 있었지만 민족학급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학생들의 발표회를 보는 기회를 가지기도 했고 어떤 학교에서는 우리 민족 음식인 떡국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여름에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만나서인지 언어의 장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고 한국과 일본에 떨어져 살고 있어도 우리들은 한 핏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민족학급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이틀 전 한 민족학급 선생님으로부터 ‘일본에서의 민족교육에 관심이 있다면 조선학교에 가 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조선시장 근처에 있는 ‘제4 조선초급학교’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날은 종업식이어서 수업은 진행되지 않았고 선생님이 성적표를 나누어 주시며 방학 동안의 주의사항 등을 말씀해주시고 계셨는데 교장 선생님이 유치반부터 고학년까지 한 반씩 친절하게 안내해주셨습니다. 그 날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설명을 들었지만 지금도 가장 인상적으로 남아있는 대목은 ‘우리 말과 우리 글을 할 수 있는 조선 사람으로 키우려면 조선학교에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라고 확신에 차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교장 선생님과 학교를 한 바퀴 둘러 보고는 교원실로 내려왔는데 학급에서 끝모임을 마친 아이들이 교장 선생님께로 뛰어와서는 자신의 성적표를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그 아이들의 성적표를 보시고 ‘최우등! 잘 했구만!’, ‘우등!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해야지!’라고 한 명, 한 명 칭찬해 주셨습니다. 정말 놀라웠던 것은 아이들의 성적표를 힐끔 엿보았는데 성적이 조금 부진한 학생들도 전혀 기 죽지 않고 당당하게 교장 선생님께 자신의 성적표를 보여드리며 웃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한 반에 약 70 명, 한 학년에 15 반, 전교 학생 수 3,000 명이 평균인 콩나물 시루 같은 한국의 학교를 다닌 저로서는 그야말로 그 모습이 ‘컬쳐 쇼크 ?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는 교장 선생님과는 물론 담임 선생님과도 인격적이며 정감 있는 개인적 관계를 가졌던 경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반에 학생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이름으로 불려질 때보다는 번호로 불려질 때가 더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조선학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수록 제가 조선학교에 첫 발을 내딛었던 그 날 보았던 광경이 결코 특이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들 한 분 한 분이 조선학교 교원을 하는 물리적 환경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욱 더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며 가르치시고 있다는 것을 거듭거듭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국의 뉴욕대학교(New York University)에서 영화를 공부했는데, 학교에 다닐 때부터 연출을 전공했고 그 동안 극영화 작업만을 해 왔기 때문에 자연히 처음에는 조선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극영화로 만들려고 생각했었습니다. 주인공을 조선학교 교원으로 설정하고 몇 개월 동안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하던 중 작년 11월 부산국제영화제의 PPP라고 불려지는 프리마켓(Pre-Market)의 신인감독 부분에 참가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를 포함한 8명의 신인감독들은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영화에 대해서 각자 10분씩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저는 그 시간에 제가 그 동안 조선학교에서 촬영했던 것을 편집하여 보여 주었습니다. 한 감독에게 할당된 시간이 모두 해서 10분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비디오를 2분 30초 정도로 짧게 편집하여 보여줄 수밖에 없었지만 그 자리에 있었던 영화 관계자들은 조선학교에서 우리 말로 진행하는 국어 수업 등을 보며 관심 어린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자리에는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친해지게 된, 고급부까지 조선학교를 나온 친구도 있었는데 그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모교의 모습이 당당하게 비디오로 나오는 것을 보고 너무 감동해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고 말해주기도 했습니다.
PPP 마지막 날 시상식에서 ‘부산영상위원회’ 상을 수상하고 상당한 액수의 상금을 받는 등의 좋은 일도 있었지만, 영화제 후 저는 오히려 새로운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영화제 때 보여주었던 비디오는 제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한 자료조사의 목적으로 최대한 수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 조심하며 촬영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사실 그렇게 잘 찍혔다고 볼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미 그 학교의 아이들과 많이 친해진 상태에서 작은 카메라로 촬영했기 때문에 아이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담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진짜로 영화를 찍을 때는 육중한 영화용 카메라와 조명기구, 많은 스탭들이 있게 될 텐데 그러면 과연 그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이 나올 수 있을지, 조선학교를 있는 그대로 영화에 잘 담아낼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다큐멘터리라는 쟝르가 더 적합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갈등할 때 제가 극영화를 준비하고 있던 영화사의 사장님이 제가 단지 주인공의 직업의 설정으로서 조선학교를 리서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깊게 애정을 가지고 계속해서 조선학교에 대해 더 알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시고는 아예 조선학교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어떠냐라는 조언을 해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선학교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아주 잘 만들어서 그 영화를 한국에서 극장에 올리는 날 영화에 나온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초청해 함께 영화를 보는 것입니다. 영화가 개봉하기 전 날 전야제 때 조선학교 학생들의 예술발표회의 마당도 마련해 이 아이들이 일본에서 나고 자랐지만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며 민족문화를 지켜가고 있는지 한국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습니다. 이 아이들이 한국 사람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본에 사는 북한학교 아이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아이들이란 것을! 그리고 또 하나의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 전역에 있는 조선학교를 순회 하며 영화를 상영하는 것입니다. 조선학교를 졸업하신 어른들과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 그리고 학교에서 헌신하고 계신 선생님들과 영화를 함께 보며 한국과 조선학교를 잇는 작은 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극장에까지 걸 수 있을 만큼의 영화적 가치가 있고 조선학교를 나오신 분들이 보시더라고 공감하실 수 있는 작품을 만들려면 방송국에서 취재하듯이 1,2 주일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촬영해서는 무리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들더라도 삶을 나누고 서로 깊이 알아가며 심도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취재와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기를 부탁 드리니 긍정적으로 검토 부탁 드립니다.


2002.03
2002.03.10
어제, B 감독과 통화한 후 <하나>를 영화화 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녀가 본명선언을 “콜레라”라고 표현한 것은 사실 충격이었다… 본명선언을 하고 이지메 당해서 너무나도 많은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하나>에서 일본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영치가 장고 좀 배웠다고 일본 학교에 가서도 본명으로 당당하게 살아가겠다고 말한다는 설정이 얼마나 어설프고 치기 어리게 느껴지던지… 부끄러웠다. 한국 사람의 교만하고 삐뚤어진 국수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이 뼈저리게 깨달아졌다.
우리는 아무 것도 그들을 도와 줄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영화를 만듦으로 인해서, 그 결과를 통해서 조선학교 아이들이 한국에 올 수 있게 될 지도 모른다는 우리의 생각은 너무나도 나이브한 발상일지도 모른다. <입국금지>에서 인터뷰했다는 이유로 더 이상 조선학교의 교단에 설 수 없게 되었다는 음악 선생님, 그리고 촬영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직위해제 당했었던 교장 선생님… 그들의 집단주의 문화는, 축구공을 다른 사람에게 패스해서 슛이 나오지 않는… 그런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결정과 발언의 자유보다 조직이 우선하는 일종의 폭력적인 면도 있다. 우리는 좋게 보이는 피상적인 모습의 그 밑부분까지 꿰뚫어 볼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어쨌든 마음이 정말 무거워졌다. 내가 보안법 위반으로 어려움에 처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4배는 더 걱정이 되었다. 만일 내가 이 영화를 만듦으로 인해서 어떤 선생님의 꿈이, 자신의 평생을 조선학교에서 헌신하려던 그 꿈이 꺾이게 되면 어떻게 하나… 나는 그 선생님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 선생님이 나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내가 연락하지 않는 편이 그를 혹은 그녀를 돕는 것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가야 하는가? 카메라를 들고…
우리가, 내가 이 영화를 가지고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는 그런 불순물적인 요소를 깨끗하게 제하여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로 겸손한, 부끄러워하는, 사죄하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가 그들에게 잘못한 역사를 우리가 품고, 마치 중보자가 죄를 품듯이, 그들에게 가야 한다는 마음이 든다.
이 영화는 무엇보다도 관계에 관한 이야기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그들에게로 다가가 그들을 짝사랑하는 이야기… (더 이상 그들이 한국에게 충성 맹세라도 하며 한국을 짝사랑하라고 했던 그 교만한 태도를 버리고.) 더 이상 우리와 그들이 아니라 함께 우리가 되는 이야기. 그것은 어떤 스토리일까?
2002.03 - 1
LKH 의 어록
“땅딸보와 뚱땡이로 매몰되고 있다.” (OOO 선생님에 관해서)
“리상만 하염없이 높고 있다.” (OOO 선생님이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
“사색과 모색의 벽에 부딪히고 있다.” (막내 동생 - 중급부까지 조선학교 나오고 호주 유학 갔다 온 - 이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다 하여 아시아나에 apply한 것이었는데 서류심사에서 조선학교를 나왔다 하여 떨어졌다고 한다. 원래 대한항공에는 붙고 있었는데 KAL은 안전성이 떨어진다고 해서 아시아나에 다시 apply 한 것이었는데 그냥 대한항공에서 일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너무 낙심하며 많이 울어서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마음이 아팠었다고 한다. 그 막내동생이 이제는 진로를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
2002.03 - 2
‘학교에서 밖에서는 아무 쓸모 없는 우리말 우리 글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라는 교무주임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너무 마음이 아팠었다.
조국의 문을 닫고 있었던 것이 우리들 무지와 편견.
아이들이 원빈을 너무 좋아해서 원빈의 말투를 흉내내고 구수한 입말(구어체)을 구사하게 돼서
“성과입니다. 이것은!” (LKH선생님)
졸업식 때 아이들이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졸업증서를 받을 때 이지상씨가 작곡한 ‘아이들아, 이것은 우리 학교란다’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들으면서 정말 눈물이 나왔다.
예술로써 총련 재일동포들과 한국을 잇는 노래.
길이 되고 싶다. 이 영화를 통해서 한국 사람들이 조선학교에 가게 되고 조선학교 아이들이 마음껏 한국에 오게 할 수 있는…
(제도를 고발하고 힘들고 불쌍하게 살아가는 재일동포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조선학교 아이들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 그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여주고 싶고, 그 아이들이 하는 우리말을 들려주고 싶다. 우리의 아이들…
남과 북을 이을 아이들 남과 북에 선을 긋지 않고 사는 아이들.